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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시(詩)

성서와문화 2009.12.28 15:33 조회 수 : 1412

 
[ 작성자 : 시바사키 사토시 - 일본 그리스도교단 출판국 과장, 시인 ]

나에게 있어 성서는 “신앙의 서(書)”인 동시에 “문학의 서”이기도 하다. 나의 외경하는 시의 선배, 이시하라 요시로(石原吉郞:1915-77)는 엣세이 <반 시간 동안의 고요-나의 성구(聖句)>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성서를 읽을 때, 무의식중에 시적(詩的)인 발상(發想)을 찾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구도적(求道的)인 독자라면 그모세는 이 자리에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본 것이다.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인생길, 노도광풍(怒濤狂風)이 휘몰아치는 험난한 인생길을 영웅적으로 싸워왔는데도 나는 이렇게 허무한 실패로 끝나는 것인가?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허무(죽음)로 끝나는 것인가?
이것은 모세의 비탄만은 아니다. 인간 그 누구도 모두 그 허무(죽음)의 종말을 경험한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모세 인생의 마지막 말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은 아니었다.
맹렬한 화염이 나를 덮쳤을 때엔 나를 바위틈에 숨겨주셨고 그 불꽃이 나를 태우지 못하도록 그의 손으로 나를 덮어 주셨던 하나님,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아온 그 어느 순간도 언제나 나와 함께 걸어오셨던 하나님, 이제사 그 분의 등이 똑똑히 보이는구나! 모세의 나이 120살이 거의 차게 되던 때다. 노년의 신앙은 하나님의 등을 보는 신앙이다.
내가 내 신앙을 살만큼 살아보니 사람은 하나님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알게 된다. 그 하나님은 먼데 계신 분도 아니요, 높은데 계신 분도 아니다. 나와 함께 한밤에도 잠자고, 한 식탁에서 겸상으로 앉아 마주보며 밥도 먹고, 농담도 잡담도 거칠 것 없이 함께 나누는 예수 하나님이시다.
칼 바르트가 그의 로마서 강해 첫 부분(1:16)에서 이렇게 썼다. “기독교를 종교일반의 하나라 한다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바르트 그 분은 그가 젊었을 때였는데도 예수 하나님의 등을 본 것이다.
노인의 신앙표현은 범사에 감사요, 감격이요, 찬양이다. 무엇을 달라하는 욕구충족의 기도가 아니다. 내 잔이 차고 철철 넘쳐 흐르나이다. 성령의 충만이다. 보장받은 영원한 생명에의 환희요, 평안이요, 극락이다.
사람은 알고 보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고 또 죽을 수도 없다.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朝聞道而夕死可也)” 사람은 노인 되는 것이 좋다. 인생의 성숙이다. 인생이 성숙하면 사람은 늙지도 않는다. 죽지 않고 그저 가는 것뿐이다.냥 지나쳐갈 만한
대목에서 지나치게 오랜 시간 머물기도 한다.
성구로서 감동하기 이전에, 시(詩)로서 감동해 버리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묵시록의 이 한 구절은 신앙이라는 테두리를 넘어 한없는
감동을 내게 강요한다.’
그 한 구절이란, 요한 계시록 8장 1절의 <일곱째 봉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하더니>이다. 이시하라는 “반 시간쯤”이라는 유예시간의 숨막힐듯한 정적의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토요일과 일요일의 이른 아침, 구약성서를 3장, 신약성서를 1장씩 읽고 있다. 그것은 나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이다. 차분히 읽고 있으면, 무심히 스쳐 읽던 한 구절에서 문득, 사고(思考)의 깊이를 느낄 때가 있다.
어느 날, 구약성서의 애가를 읽고 있을 때, 다음과 같은 대목을 만났다. 도성 시온아, 너를 무엇에 비겨서 위로하랴? 네 상처가 바다처럼 큰데 누가 너를 낫게 할 수 있겠느냐” (2:13 표준새번역 개정판).
나는 다시없는 기쁨에 감동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 대목을 몇 번이나 읽었음에도 어째서 깨닫지 못했을까. 그것은 틀림없이 내 편에 그 말씀을 받아드릴 만한 기량이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바다”는 오랫동안 “깊은”이라는 형용사를 끌어내는 비유로서 쓰여져 왔다. 그것은 이제는 평범한 비유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내가 다시 읽은 성서 역문(譯文)에서는 “바다”는 “깊은 상처”를 입고 있다. 라고 읽혔다. 거기에 나의 감동의 근원이 있었다.
우리는 바다를 보면 다양한 감개를 느낀다. 웅대함, 광대함, 고요함, 격(激)함 등등. 그 바다가 “깊은 상처”를 입고 있다고 느꼈을 때, 그 바다와 우리의 거리는 급속히 가까워져서 바다를 향한 친근감이나 애처러움이 우러난다. 우리에게도 “깊은 상처”를 입어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바다의 속마음이 한층 깊이를 더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에 따라 성서를 읽어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잘못된 독법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성서는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직접 작용하여 살아가는 힘과 지침을 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씀은 그중 으뜸가는 것이리라. 예수는 신변 가까이에 있는 것을 비유로 사용하여 설교하고, 전도했다. 나는 예수님이야말로 시인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시인의 요건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비유의 구사이다. 예수님이 말한 말씀을 본다면, 시인을 방불케 하는 비유가 넘쳐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요한복음 15:1-5 개역 개정판).
여기에는 비유나 리프레인 등의 시의 기법이 아무렇지 않게 쓰여져 있다. 특히 포도라는 식물의 자질 외에 농작업의 자초지종이 파악되어 있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긋남이 없이 기술되어 있다.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라 일컬어져 왔지만 포도재배자의 아들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이다.
둘째는 예언(預言)이다. 예수님은 광대무변한 저편에서 보내오는 메시지를 일단 자신이 맡아서, 우리에게는 주로 비유를 써서 전한다. 시인 역시 크나큰 존재로부터 보내오는 메시지를 일단 맡아서, 시라는 형태로 정착시켜 읽는 사람에게 보내준다. 예언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서도 시도, 어디까지나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의 세계를 다듬어 간다. 언어에 의해, 모든 일과 사물은 널리 퍼지고 깊어진다. 재능이나 자질이나 노력이나 경험까지도 포함한 쓰는 이와 읽는 이의 공동작업에 의해 성서도 시도 한없이 성장해 가는 것이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조각도 우주에 산재해 있는 메시지를 구체적인 형체를 가진 조각에 의해 우리에게 내 보인다. 김효숙(金孝淑)이 제작하는 테라코타에서도 나는 고매한 뜻을 느낀다. 그 조각은 구상과 추상 사이에 있으며,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형태와 소재(素材)의 색을 가지고 있다. 하늘이 주는 불의 세례를 받으면, 그 색채가 흙 위에 구워진다. 거기에는 하늘과 땅의 색깔이 융합해 있다. 조각가의 의도를 훨씬 넘은 조각의 기품(氣品)과 수직축(垂直軸). 수평축(水平軸)이 생겨나 있다.
작년 12월에 세상을 뜬 극작가 타가도 카나메(高堂 要)가 생전에 되풀이하여 주장했던 수직축과 수평축은 그의 희곡에서 충분히 달성되어 있다. 무대 위에서 우왕좌왕하는 배우의 움직임을 수평축으로 한다면, 천상에서 내려 비치는 빛, 흘러내리는 소리, 매달려 내려오는 시체, 그 모두가 수직축을 나타내고 있었다. 작가가 죽어도 작품은 남몰래 성장을 계속할 것이다.
성서도 시도, 그 수직축과 수평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 교차하는 한 점을 겨냥하여 창작 의욕은 고조되는 것이다. <정종화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