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02년 성서와 문화

인생과 신앙

성서와문화 2009.12.28 15:32 조회 수 : 1408

 
[ 작성자 : 조향록 - 초동교회 명예목사 ]
 
계간 “성서와 문화” 편집자로부터 내게 “노년과 신앙”에 관하여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주제를 “인생과 신앙”으로 고쳐 내 마음의 고백적 산문을 쓴다.

 

1. 어린 시절과 신앙
(전도서 12:1)
나는 어렸을 때(세살) 예수를 믿었다. 아버지의 예수를 따라 믿었다. 무식한 아버지는 전해주는 예수를 고지식하게 그대로 믿었다. 예수를 배울 수 있는 교과서는 성서뿐인데 성서를 읽으면서도 그 말씀을 그대로 믿어버렸다. 이해되지 않는 것도 의문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니 의당 그렇치! 하고 그대로 믿었다. 이렇게 따라 믿는 예수도 우직하게 믿어가니 내 마음 속에 예수의 조상(造像)이 꽉 차서 평안했다. 죄렌 키에르케고어는 “젊었을 때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는 긴 설교를 썼다. 거센 풍랑이 일어 앞길을 분별할 수 없는 인생바다에 나서기 전에 가야할 네 인생길의 마지막 목표를 확실히 잡아두라는 글이다. “실패는 성공의 기초”란 말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단 한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길인데 실패는 곧 자살이기 때문이다. 어려서 내 마음 속에 새겨 넣은 예수는 내가 가야만 할 내 길이요, 또 내 인생의 바른 목표였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닮아서”는 인생에 바른 길이요, 바른 목표다.
미지의 미래를 향해 투신하는 인생을 도박이요 모험이라 한다면, “하나님께 걸고 투자하는 것은 손해는 없고, 걸리면 엄청난 폭리를 얻게 된다.” 라는 철학자 파스칼의 말은 농담이 아니라 진리다.

 

2. 청장년과 신앙 (창세기 28:15)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따라 길을 걷는 것이다. 예수의 3년은 길만 걸어가신 3년이다. 쉼 없이 혼자서 걸어 가셨다. 집도 가족도 없이 혼자서 걸어 가셨다. 아스팔트길도 아니다. 하이웨이도 아니다. 굽이굽이 돌고 도는 길, 높은 언덕, 낮은 골짜기, 개울도 강물도, 호수도 바다도 건너는 인생길이다. 두 다리 가진 사람은 누구라도 갈 수 있는 평범한 인생길이다.
그런데 인생의 바다에는 내 길이 따로 없다. 육지라면 밀림지대다. 인생은 누구나 제 갈 길을 혼자서 단 한번만 가는데 내 길이 따로 있을 수도 없다. 그러니 어차피 누구의 옷깃을 잡거나 손을 잡고 가는 수밖에 없다. 나와 같이 모험심이 약한 사람은 일찍 예수 따라가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더군다나 예수와 사귀어 훨씬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예수가 크게 높은 분이 아니라서 더욱 좋았다. 그 분은 정말 수수한 평민이었다. 인생을 살고 보니 평민의 맛이 사람 제 맛이다.
내가 자란 곳이 수목이 짙은 산골이었고, 내가 지금 사는 곳 또한 삼각산 밑에 있어 늘 푸른 초목을 벗 삼아 살아보니 철따라 피었다 지는 꽃보다도 항상 싱싱한 푸른 색깔이 천배 만배 더 아름답다. 언제 봐도 지치지 않는 색깔이다. 예수 색깔도 그렇게 바탕 색깔이다.
그러나 예수를 아는 사람들이 예수가 자기 곁에서 같이 사는 것이 좀 거북해서인지 그 분을 더 높은데 모시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수를 따로 모시는 집을 짓고 예수가 앉을 보좌까지 만들어 놓고 그 위에 앉게 했다. 값진 비단옷을 입히고 머리 위에 황금 면류관을 씌웠다. 휘황한 태양빛으로 예수 색깔을 만들었다.
하느님은 그의 아드님을 사람이 되게 하여 사람 속에서 사람으로 살게 했는데 사람들은 그 예수를 하느님께로 돌려보내고 하나님의 오른편 옥좌에만 앉아있게 했다.
“지나친 효도는 불효의 변태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를 십자가 형틀에 못 박아 죽였다. 요새 예수 이름으로 한 몫 보는 사람들은 예수를 성전간판 뒤쪽벽면 옥좌에만 앉아있게 거기 못 박아 두었다. 그 예수는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들의 못 볼 짓들까지도 안 볼 수 없어 억겁을 형벌 받은 자로 울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영원히 살아계신 자다. 자유하신 자요. 자유 자체시다. 실로 다행이다. 그것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이 언제나 사람들 속에서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나는 내 인생이 철들어 가면서도 그것을 똑바로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내 앞에 가시는 그 분을 태양빛에 반사된 내 그림자로 잘못 알고 그 분을 주목하지 않았다. 어느 때는 그 분이 내가 가는 길을 나와 함께 걸어가셨는데도 나는 그 분을 그저 지나가는 길손으로 알아 무심(無心)했다. 한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처럼...
그 분은 내 뒤에서 내가 가는 발자국 자국마다 실수 없이 가는가를 지켜보시며 뒤따라 오셨는데도 나는 그 분은 없는 것으로 무시해 버렸다.
인간은 이렇게 오만한 영혼의 지진아(遲進兒)이기도 하다. 그러나 때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진실할 때도 있다. 그 때면 자기가 자기 진상(眞相)을 바로 보게 된다. 또 예수가 자기 곁에 계신 것도 알게 되고 또 보게도 된다. 내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내 속에 예수가 산 예수로 화신(化身)이 되었다.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사시는 예수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게 된다. 내게 믿음을 더 하소서. 그 제자들처럼 간구하게 된다.

 

3. 노년과 신앙(욥기 42:5)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더 확실히 고백하게 되는 때가 또 있다. 언제인가. 내 인생이 걸어 온 길을 뒤돌아보는 때다. 노년에 이르러서다. 인생에서 노년기는 자기 회고의 시기요, 신앙고백의 시기다. 출애굽기 33:23에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내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는 재미있는 말 한마디가 있다. 이 한마디 말을 이해하려면 그 위에 쓴 긴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
모세가 애굽에서 노예생활 하는 자기 민족을 해방시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다. 한달 안에 갈 수 있는 길인데도 그 길목에 사는 부족들에게 막혀 시나이 반도에서 40년 긴 세월을 돌고 돌아 이제사 가나안 땅 가까이까지 이르렀다. 모세는 자기 백성을 뒤에 두고 혼자 시내산에 올라갔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할 자기 백성들이 대를 이어 지키고 살아 가야할 “삶의 법도”를 하나님께로부터 받고자 해서다. 40일간 모세는 하나님의 법도를 받아 그 돌비석을 안고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오는 길이다. 산 아래 거의 이르렀을 때다. 어인 일인가? 아론이 그 백성과 함께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세워놓고 거기에 예배하고 춤을 추는 것이었다. 모세는 그만 손에든 돌비석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하나님의 법도가 필요 없게 된 상황이다.
성난 모세는 자기를 따르는 레위족속 특공대를 지휘하여 그 광란한 (황금우상에 취한) 군중을 -자기가 해방시킨 동족인데도- 하루에 3천명을 죽였다. 민족해방도, 광야 40년간의 인고(忍苦)도, 땅에 떨어진 돌비석이 부서지듯 이렇게도 허무하게 슬픈 종말로 끝나는 것인가? 모세는 눈앞이 캄캄했다. 과연 하나님이 계신 것일까? 있다하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모세는 깊은 회의에 빠진다. 이 순간 모세에게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인간, 역사, 신, 신앙, 진리, 가치 등- 모두 의미와 근거를 잃고 깊은 수렁, 무저항(無抵抗)에 빠져 버리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산으로 올라와 새 계명을 받으라 하신다. 그 때 모세는 “그러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당신의 얼굴을 내게 보여 주시요. 아니면 증거(영광-싸인)라도 보여 주시오” 하고 말한다. 즉 말로서만 아니라 당신의 실체를 보여 달라는 말이다. 이것은 항변이요, 질문이다.
그 다음에는 이솝의 우화 같은 불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는 환상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내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는 하나님의 대답으로 끝을 맺는다.(출 33:23)

 

모세는 이 자리에서 지나온 길을 돌아 본 것이다.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인생길, 노도광풍(努濤狂風)이 휘몰아치는 험난한 인생길을 영웅적으로 싸워왔는데도 나는 이렇게 허무한 실패로 긑나는 것인가?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허무(죽음)로 끝나는 것인가?
이것은 모세의 비탄만은 아니다. 인간 그 누구도 모두 그 허무(죽음)의 종말을 경함한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모세 인생의 마지막 말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은 아니었다.
맹렬한 화염이 나를 덮쳤을 때엔 나를 바위틈에 숨겨 주셨고 그 불꽃이 나를 태우지 못하도록 그의 손으로 나를 덮어 주셨던 하나님, 내가 이세상에 태어나게 된 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아온 그 어느 순간도 언제나 나와 함께 걸어오셨던 하나님, 이제사 그 분의 등이 똑똑히 보이는구나! 모세의 나이 120살이 거의 차게 되던 때다. 노년의 신앙은 하나님의 등을 보는 신앙이다.
내가 내 신앙을 살만큼 살아보니 사람은 하나님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알게 된다. 그 하나님은 먼데 계신 분도 아니요, 높은데 계신 부도 아니다. 나와 함께 한밤에도 잠자고, 한 식탁에서 겸상으로 앉아 마주보며 밥도 먹고, 농담도 잡담도 거칠 것 없이 함께 나누는 예수 하나님이시다.
칼 바르트가 그의 로마서 강해 첫 부분(1:16)에서 이렇게 썼다. "기독교를 종교일반의 하나라 한다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바르트 그 분은 그가 젊었을 때였는데도 예수 하나님의 등을 본 것이다.
노인의 신앙표현은 범사에 감사요, 감격이요, 찬양이다. 무엇을 달라하는 욕구충족의 기도가 아니다. 내 잔이 차고 철철 넘쳐 흐르나이다. 셩령의 충만이다. 보장 받은 영원한 생명에의 환히요, 평안이요, 극락이다.
사람은 알고 보면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고 또 죽을 수도 없다.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朝聞道而夕死可也)" 사람은 노인 되는 것이 좋다. 인생의 성숙이다. 인생이 성숙하면 사람은 늙지도 낳는다. 죽지 않고 그저 가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