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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단상(斷想)

성서와문화 2009.12.28 15:31 조회 수 : 1276

 
[ 작성자 : 유동식 - 신학 ]
 
가을이다. 푸른 잎이 다홍치마로 갈아입는 가을이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일뿐 머지않아 잎은 떨어지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게 하는 엄동설한이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나무는 죽는 것이 아니다. 새 잎으로 단장하게 될 또 하나의 새 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화가 단원 김홍도(1745-1806)는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를 그렸다. 포구에 있는 배안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피안에 핀 매화꽃을 바라보는 그림이다. 죽음의 엄동설한을 뚫고 피어나는 매화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건너 가야할 강은 짙은 안개로 가득 차 있다. 죽음의 신비는 안개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단원은 인생을 되돌아보며 다시 이렇게 읊었다.

 

봄물에 배를 띄워 가는대로 놓았으니,
물아래 하늘이요, 하늘 위에 물이로다.
이 중에 늙은 눈에 뵈는 꽃은
안개속인가 하노라.

 

흐르는 물과 영원한 하늘은 둘이면서 하나이다. 물 속에 하늘이 있고, 하늘 속에 물이 있다.

 

사람은 늙고 병들어 죽게 마련이다. 그러나 종교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가르치고, 예술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종교.예술적 인간에게는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의 겨울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봄이 오고 꽃이 피게 마련이다.

 

나도 이제는 피안을 향해 배를 띄워야 할 포구 가까이 와 서 있다. 지난날들이 주마등 같이 나를 스쳐간다. 그리고 나는 하늘 저편을 그려본다.

고향을 그리며 바람 따라 흐르다가,
아버지를 만났으니 여기가 고향이라.
하늘 저편 가더라도 거기 또한 여기거늘,
새 봄을 노래하며 사랑 안에 살으리라.

 

내가 평생을 두고 그리며 살아온 곳은 자유와 아름다움이 지배하는 평화의 고향이며, 내 모습 있는 그대로 받아주실 어머니의 품이었다.
고향을 찾아가는 나그네의 길은 언제나 불안하기만 했다. 나는 그 때 그 때마다 가야할 방향을 찾아야만했고, 나름대로의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그러나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면 내가 홀로 계획하고 그대로 살아 온 것이 아니었다. 실은 바람에 밀려 물 흐르는대로 따라온 인생에 지나지 않았다.
몇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긴 일이나, 공부하게 된 경로나, 직장을 전전한 일이나, 믿음의 우여곡절 등등.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걸어 왔다기보다는 바람(성령)에 밀려 흘러온데 지나지 않았다.
내가 즐겨 쓰는 풍류(風流)라는 말에는 멋스러움보다는 바람 따라 흐른다는 뜻이 더 강할듯하다.
그런데 바람이 나를 밀어부친 곳은 놀랍게도 하늘 아버지가 계신 고향이었다. 내 모든 부족함을 감싸주시고 채워주시는 어버이가 계신 고향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원과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믿으며, 그 것을 규명해 보기 위해 신학의 길을 걸어 왔다. 그리고 그 믿음과 학문을 하나로 수렴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요한복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이 오시는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는 내 안에 있고, 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되리라.”(요한 14:20)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핵심이다. 이것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삼원색으로 된 삼태극도가 된다. 셋이면서 하나의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다.
삼태극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의 조화를 이룬 우주를 나타내는 것이며, 종교와 예술과 인생이 하나로 어우러진 풍류도 곧 한국인의 영성의 구조를 나타내는 형상이기도하다. 그로부터 삼태극은 항상 나의 신앙과 삶의 화두가 되어 왔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하나가 된 것이다. 하나 됨이란 파기 될 수 없는 천륜으로서의 아버지와 자녀 사이가 된 것을 뜻한다. 이것을 다시 천명한 것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내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의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요 20:17)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파기할 수도 있는 계약관계(유대교)가 아니라, 불가분리의 혈연관계로 변하게 한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여기에 우리들의 구원의 근거가 있다.

 

어버이가 계신 곳이 고향이다. 아버지를 만났으면 여기가 고향이다. 영원한 생명과 안식처는 내세에 가서 비로소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아니하고,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 5:24) 영생은 이미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자로서 살아간다.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생사의 세계로부터 자유하는 것이며,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평화를 누리는 것이며, 우리 안에 임재하신 성령에 힘입어 창조적인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요 20: 19-23)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는 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의 담이 무너진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인간의 죽음을 말살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새벽이 동틀 때 수평선 넘어 하늘 저편을 향해 포구를 떠나야만 한다. 그러나 그 곳 역시 아버지의 집이요, 우리들의 새로운 고향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고, 새 생명이 꽃피는 봄 동산이다. 샤론의 꽃향기 속에 노래로써 화답하는 새 고향이다. 우리는 아버지의 품 안에서 살 것이며,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과의 사랑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우주적 사랑의 공동체 속에서 영원히 살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