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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예술에 대한 단상

성서와문화 2009.12.23 19:55 조회 수 : 1709

 
[ 작성자 : 최종태 - 서울대 명예교수, 조각 ]

 

스므해쯤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조소과 4학년 교실에 독실한 불교도 학생이 있었습니다. 내가 독실하다는 표현을 한 것은 불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수련회도 열심히 다니고, 그런 열의가 눈에 띄게 활발하였다는 뜻에서 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내면의 일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므로 깊다, 얕다 그 정도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접어두고 그 학생이 불교의 뜻을 작품에다 표현하려고 애를 많이 쓰고 있는 것이 어쩐지 내 마음에 걸린 것입니다. 몇 달을 지켜보다가 하루는 다음과 같은 말을 슬쩍 던졌습니다. 불교공부는 그것대로 하고 조각공부는 또 그것대로 하고 그렇게 양분할 수 있으면 어떻겠느냐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그 둘이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으면 참으로 좋은 일이고 그렇게 안되더라도 할 수 없다……. 그렇게 마음을 너그럽게 먹을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그랬습니다. 예술이 종교를 설명하는 도구가 되는 것도 불편한 관계이고, 또 그렇게 열렬한 종교생활이 예술활동하고 남남인 관계로 된다는 것도 사실은 불편한 일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조급하게 생각한다는 것 또한 양쪽 모두에게 이롭지 않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습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나의 스승께서 했다는 말씀을 전해들은 게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가지 종교를 어떻게 생활할 수 있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말씀 속에는 미(美)의 탐구란 것이 종교와 다름이 없다 하는 뜻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미의 탐구와 종교적 진리의 탐구란 것이 한가지로 같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국에 있어서 당도해야 할 곳이 하나가 아니냐 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길이 각각이다 하는 뜻입니다. 진선미는 하나로되 길은 각각이다 하는 말입니다. 한 사람이 어찌 셋을 동시에 어떻게 생활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사실 중대한 문제입니다. 잘못 했다가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삶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께서는 죽음을 몇 달 앞두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아름다움에의 탐구생활이 끝났을 때 신앙이라는 큰 생활의 절차가 행사되었다 그런 이야기가 됩니다. 많은 세월이 갔는데도 그 일만은 엄숙한 추억으로 나의 가슴 안에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화가 마티스가 한때 병원신세를 진일이 있었는데 그 것이 인연이 되어 이른바 「방스의 성당」이 생겨났습니다. 병원에서 간병역을 맡았던 소녀가 있었습니다. 뒷날 그녀는 수녀가 되었습니다. 몇 해 전에 그 수녀의 수기가 출판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마티스와 그 수녀는 그 뒤로도 편지를 주고받고 하여 화제 아닌 화제가 있었다합니다. 알고 본즉 다음과 같은 애틋한 사연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티스는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 쪽 사람들은 아기 때에 누구나 유아세례를 받는 것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지금 유럽에서는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지극히 적다는 것입니다. 마티스도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간호하는 소녀, 뒷날에는 수녀가 된 그 여인은 입장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 여인은 매우 독실한 신앙인 이었을 것이고 마티스는 그렇지 않은 데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저렇게 훌륭하고 좋은 예술가 할아버지가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깝기가 너무나도 절절했던 것입니다. 교회생활이 없으면 지옥 간다는 교리를 믿는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회개시켜 교회에 돌아오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나중에는 마티스 또한 안타까워 답을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일생을 색채를 통해서 하느님을 찬미했노라!” 그런 단호한 표명을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예술가는 아름다움이라는 길을 통해서 신앙을 생활하고 있다는 점을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티스도 옳고 수녀도 옳고, 더하고 덜하고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성모상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성모상말고도 많은 성상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지 누가 시킨다고 한 일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내게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늘 만들고 있는 작품을 할 때하고 성모상을 만들 때하고 무언가 자세가 다른 것으로 생각하고 그 점을 묻는 것입니다. 소녀상을 만들고 풍경을 그리고 할 때, 그리고 성상조각을 만들 때 무언가 다른 것이 아니냐 하는 궁금함 말입니다.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림은 나의 삶의 반영입니다. 문장은 곧 사람이다 하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풍경에 투영하는 나의 삶이 다르고 성상에 투영하는 나의 삶이 다르다면 앞서 말한 명언은 틀린 말이 될 것입니다. 만드는 대상이 다를 뿐이지 표현하는 마음의 자세까지 다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모상을 만들어도 성상이고 꽃 한 송이를 그려도 마음자세에 따라서는 성상입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세상 만물에 귀천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인들은 하나같이 같은 뜻의 말씀을 하였습니다. 도는 어디에나 있다! 만상에 불성이 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대로 세상이 만들어졌다. 그러니 귀한 것과 천한 것을 구별할 일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만상이 다 거룩함일 것이니 귀하고 천하고는 그리는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는 신앙과 예술이 갈라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신앙 따로 예술 따로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동양, 서양 할 것 없이 수백년 된 일입니다. 19세기 중반 이른바 인상파시대가 되면서 미술은 순수미를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의 문제로부터는 그 먼저 떠났고, 세상의 문제와 인간의 문제까지도 미술에서 제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림은 오로지 아름다움의 문제로 국한되었습니다.
예술이 사람 사는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현금의 미술계를 총별할 적에 옛날하고 확연히 다른 점이 그 점입니다. 예술이 아름다움만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와 예술이 하나로 있었던 시대는 옛날 이야기입니다. 그림이 사람 사는 이야기로부터 분리 독립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 따로 하고, 예술생활 따로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미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곁가지를 모두 떼어낼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절대적 가치를 여러 측면으로 나누어서 탐구한다는 것입니다. 학문이 세분화되는 현상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이러한 추세로 가야할 것인가 하는 것은 의문입니다. 특히 예술이란 분야에 있어서 말입니다.
그림은 계속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예술가들은 새로운 것 만드는 강박관념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어쩌면 종합에로 지향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종합마저도 넘어서서 절대한 자유, 절대한 순종의 세계에로 지향하는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술과 신앙은 각각 반대 방향으로 치닫는 이상현상으로 부각되었습니다. 어떤 한편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태동하고 있습니다. 분화로 해서 얻는 높은 성취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통제불능일 때 평화가 깨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합리주의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과학으로 또 통제기능으로 결말이 날줄 알았는데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영혼이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알 수는 없으나 이름하여 영적인 목마름, 그런 큰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물량의 풍요만이 행복의 조건은 아니라는 자각입니다.
아름다움의 끝자리는 성스러움의 곳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합니다. 성스러운 곳은 어디인가. 이론으로 안다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삶이 거기에 당도해야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화가 루오는 그렇게 살고 그렇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연민의 삶이라 할까 예수의 마음을 담고자 그것을 그림으로 실현하려 일생을 바쳤습니다.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성서의 이야기를 훌륭한 예술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믿음의 삶이 없는 공허가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경우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형태에 영적인 삶이 배어있음을 봅니다. 그런 면에서「론다니니의 피에타」는 눈여겨볼 만한 작품입니다. 마네씨에의 추상그림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순수조형미만이 아닌 이름할 수 없는 어떤 오묘함이 있습니다. 고려시대의 불화, 로마네스크, 비잔틴의 그림들 속에는 조형미만이 아닌 어떤 내용이 있습니다. 선사시대의 동굴벽화나 아프리카의 토종조각에서는 어떤 영험한 힘을 느낍니다. 현대미술이 잃어버린 어떤 세계 말입니다.
영의 세계를 잃어버린 허무가 있습니다. 성스러운 세계로부터의 차단된 고독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신앙을 상실한 시대의 섭섭함이 있습니다. 나의 신앙은 실낙원에서 다시 낙원으로의 회귀입니다. 그래서 나는 예술이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술이라는 것에 굳이 의미를 부여한다면 세상 맑히는 일이 아닐까. 그리하여 예술은 성스러운 곳으로 인도하는 안내자. 누가 말했던가. “아름다움이 인류를 구원한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