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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片紙(2) - 음악과 언어 -

성서와문화 2009.12.23 19:51 조회 수 : 1680

 
[ 작성자 : 김순배 - 한성신학대 교수, 음악 ]

 

‘책 읽어주는 여자’라는 영화를 기억합니다. ‘그림 읽어 주는 여자’ 라는 책도 아마 있었지요? 그러나 악보만큼 읽혀지고 이해되기를 원하며 페이지 위에 조용히 놓여있는 얌전한 기호와 부호들이 또 있을까요? 작곡가의 의도대로 악보에 배열된 의미 부호들은 연주자의 해석과 실현을 거치지 않으면 온전한 예술의 형태를 갖출 수 없습니다. 읽어주는 이를 기다리는 기호들과 사인(sign)들은 음악이 비로소 음악되게 하는 결정적 단서들인 셈이지요. 그래서 음악은 숙명적으로 이중구조를 가진 예술입니다.

 

언어 즉 말만이 생각과 느낌의 유통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수단인가요? 때로는 역설적으로 ‘말’이 의사소통의 장애물이 되기도 하는게 사실입니다. 말에 따르는 숱한 오류들, 말하는 이와 전달받는 이 사이에 발생하는 의미의 왜곡과 변형들, 이해가 아닌 ‘오해’에 의해 결단나고마는 의사소통의 아픈 기억들을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자유로운 의미공간을 무한히 거느릴 수 있는 음의 세계야말로 훨씬 풍요로운 의미교류의 장이 아닐까 생각도 됩니다. 실제로 음악을 구성하는 화성, 리듬, 가락 그리고 구조(structure)의 요소들이 어우러지며 교차되어 빚어내는 의미체계는 언어에서의 그것과 아주 흡사합니다. 말할 때의 억양과 어조, 특정부분을 두드러지도록 하는 강세와 액센트, 작게 속삭일 때와 몰아치며 포효할 때 느낌의 차이 등은 고스란히 음악에서도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한 단어에만 집착할 때 놓치게 되는 정작 중요한 전체의 의미나 분위기 같은 것들도 두 세계에 공존하는 속성이구요.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음악의 화법(話法)에 주관의 빛깔을 뚜렷하게 칠해놓은 거의 최초의 작곡가로 기억될 것입니다. 물론 조스켕 데 프레(Josquin des Prez)와 같은 ‘르네상스의 베토벤’이라 일컬어지는 강한 개성의 작곡가도 있었지만 그는 시대적인 여건이나 인간의 세계인식이 마음놓고 주관적이기엔 아직 미숙했던 시점의 인물이었지요. 베토벤에게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다이내믹, 즉 음들의 셈 여림에 관한 창의적인 사고방식입니다. ‘Fp’라는 사인은 어떤 음을 크게 낸 직후 바로 정반대의 여림으로 가라는 뜻인데 순식간에 두 극단을 오가라는 힘겨운 주문이지요. 한편 ‘점점 크게’라는 crescendo 사인 후 예상외로 앞을 막는 ‘subito piano(갑자기 여리게)’ 같은 표시는 말이나 문장의 반전법 내지는 반어법을 강하게 연상시킵니다. 베토벤에게는 온 세상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치고 싶지만 차라리 안으로 숨을 죽인 채 속삭이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절박한 말들이 많이도 쌓여 있었나 봅니다. 어쩌면 정말 중요한 말들은 결코 큰소리로 말해지지 않고 또 그럴 필요도 없는지 모르지요.
여러마디의 말보다도 침묵이 더 많은 뜻을 전해주는 때가 있는 것처럼 정작 베토벤의 음악에서 의미심장한 것은 바로 쉼표입니다. 빽빽하게 모여있는 음들의 어떤 집합보다도 연주자를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베토벤의 불가사의한 쉼표들이지요. 음들 사이에 놓여있는 이 잦은 쉼표들에서 연주자는 무엇을 생각하고 느껴야 하나요? 음악도는 이 쉼표들 사이에서 성숙해 갑니다. 말없는 행간(行間)을 읽는 능력을 기르는 것도 바로 이 어색한 지점에서입니다. 베토벤은 언어를 넘어서는 ‘말없음표’의 효용을 직관으로 꽤뚫었던 드문 작곡가임에 틀림없습니다.

 

한편 음악의 해석이란 시의 그것과도 같아서 읽는 이에 따라 빛깔이 달라지기도 하고 어떤 단어, 문장에 역점을 두고 읽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읽는 속도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텍스트와 읽는 이 사이의 거리나 긴장감 여부도 민감한 변수가 됩니다. 그러나 결국 읽는 이가 얼마큼 텍스트를 이해하고 얼마큼 그것과 합일되어 있는지가 관건이겠지요.
음악을 음악 외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도구로 여기거나 반면 음 자체의 질서와 구조의 아름다움이 만들어내는 자족적인 세계로 양분하려는 경향에 대해 지난 편지에서 언급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그러니까 소위 절대음악(absolute)의 명제를 지지하고 실행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 자체내의 어법과 문법이 분명 존재함을 부정할 길 없습니다. 그에 대응하는 표제음악(program music)역시 범람하지 않는 감정의 강도와 수위가 ‘세련된 취향(good taste)’에 의해 잘 조절되어 있는 경우에만 음악외적 영감이 주는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음악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설득력’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는 듣는 이와의 성공적인 의사소통인거지요. 이 설득력이라는 어휘 속에는 가히 한 ‘세계’가 통채로 들어있다고 보여집니다. 어떤 의미구조가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그것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과정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얕은 잔머리로 급조할 수 없는 포괄적 통찰력과 무엇보다도 ‘진실’입니다. 잔재주에 불과한 기교가 갖는 한계는 그 길고 짧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금새 그 바닥을 드러내고 맙니다.

 

의사소통(communication)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모든 표현행위-음악에 있어서의 연주행위도 예외가 아닌-가 추구하는 목표는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물론 예술가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적인 욕구나 기타 여러 욕망들이 일방적으로 감상자들에게 손 쓸 틈없이 밀려오기도 하고 감상자에 대한 의식이나 배려가 잠재적으로라도 존재하지 않는 ‘무례한’예술들이 엄존하기도 하지만요. 그러나 그런 극단적인 경우에 있어서조차 예술의 ‘생산자’들 무의식 속에는 자신의 표현에 공감하고 영향받는 불특정 동조자들에의 갈망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 듯 합니다. 문제는 모든 예술행위들로부터 ‘의사소통’이 배제되거나 차단되었을 때의 썰렁함은 그 어느 것에도 비견할 수 없는 쓸쓸함 그 자체라는 겁니다.
음악회의 청중들은 언제라도 설득 당할 태세를 충분히 갖춘 사람들입니다. 하긴 어느 원로 피아니스트 한 분은 다른 이의 연주회에 절대 못 가는 이유로 무대 위의 연주자와 자신이 동일시되어 한 치도 긴장을 풀지 못하는 상태를 견딜 수 없어서라고 하십니다. 바로 음악하는 이들의 ‘어두운 뒷모습’ 인거지요. 그러나 정상적인(?) 청중들은 순수합니다. 그들에게는 악의가 없습니다. 유학시절 작은 갤러리에서 여는 연주회 무대 뒤에서도 긴장하는 제게 한 친구는 ‘저기 천진난만하게 앉아서 연주를 기다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네 연주를 비평하거나 폄하시키기 위해 이 곳에 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appreciate하기 위해서 그리고 공감하기 위해서 이 곳에 있는 것’이라는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문제는 ‘연주행위자’들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연주의 ‘촛점’을 ‘듣는 이들’에게 맞추지 않고 ‘자기자신’에게 맞추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번 편지도 두서가 없습니다. 음악과 언어 그리고 의미와 그 전달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소통체계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사람이 사람다움을 잃어 가는 세상, 성서에서 말씀하는 ‘마지막 때’의 예감이 설핏 설핏 다가오는 혼란의 이 시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군요.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음악도들이 타고난 재능이나 氣를 발산하는 도구로서 자신의 예술을 다루는 일차적인 상태를 넘어서서 진정한 ‘타인과의 교감’에 대해 깊이 사고하지 않는 한 우리의 언어가 쉽게 그리되듯 음악의 ‘소통장애’ 현상도 가속화되고 말리라는 우울한 전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