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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海漫遊

성서와문화 2009.12.23 19:50 조회 수 : 1755

 
[ 작성자 : 조향록 - 초동교회 원로목사, 신학 ]

 

1952년 8월이었다. 長空은 부산 남 부민동 한국신학대학 가건물에서 두 번째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피곤을 쉬고 싶었던 모양이다. 김해 진영에 있던 岩山과 나를 찾아왔다. 일주간 남해 만유(漫遊)를 함께 즐겨보자는 제안이었다. 우리도 한얼 고등학교 재직 중 방학이라 별로 갈 곳도 없어 허전하던 참인데 얼싸 좋다하고 수영복에 손수건 몇 개를 싸들고 함께 떠났다.
진영에서 마산까지는 그 때 버스로 겨우 한 시간 거리다. 오후에 떠나 마산에 들렸다. 구 마산 시장바닥과 부둣가를 들려 신 마산까지 한 바퀴 돌고 나니 이럭저럭 해는 西天에 기울어 간다. 급히 오라는 곳도 없고 가야할 의무도 없는 길이니 여기서 한 밤을 쉬면서 마산의 밤바다를 구경하자 했다. 노산 이은상의 가고파에 ‘내 고향 남쪽바다’ 는 마산 앞 바다를 두고 쓴 고향 바다다.
시골 정취에 때묻은 구 마산도 따스하게 정들지만 일본인들이 살다간 신 마산은 거리도 바다도 더욱 정갈하여 청순한 맛이다. 비탈진 산허리까지 줄을 맞추어 지어진 일본식 양옥집들과 해안 가까이 낮은 언덕길에 줄지어 서 있는 호텔 같은 구 유곽 건물들은 머리를 처박고 도망쳐 돌아가던 일본인들의 모습처럼 그렇게 부끄러워 떨고 있는 듯 공손해 보인다. 8.15를 막 넘긴 때라 보름달이 약간 기울기는 했어도 신 마산 앞 바다에 빠져있는 달빛은 항구 저편에 진해 쪽 산들도 으스름이 보일 정도로 밝다. 팔월 한 여름이었으나 그 때는 밤까지 즐기는 수영객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적막한 느낌이다. 우리 셋은 수영복 차림으로 바닷가에 앉아 발을 잠그고 중천에 떠 있는 달을 처다 보면서 만유 첫 날 밤을 제목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관에 들어가 잤다.
둘쨋 날 통영이었다.
통영은 시인 유치환의 고향이다. 그러나 이번 길에 우리는 아는 사람 만날 사람은 완전히 외면하기로 했다. 장공과 나는 통영이 처음이었다. 육지에 붙어 있는 통영 시내는 아름답지만 통영 앞 바다를 둘러 점점이 앉아 있는 섬들, 다도해 풍경은 절경이다. 통영 해수욕장은 배를 타고 나가야 한다. 수많은 수영객들 속에 섞여 우리들도 애기처럼 물장난을 쳤다. 장공이 그때 50대 초반이고 우리는 30대 초반이니 크게 어색하지는 않았다. 전쟁이 아직 끝나지는 않았으나 재발의 위험은 없는 때다.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백사장에서 알몸으로 뒹글러도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어 더욱 좋았다. 하루를 십년 같이 길게 즐겼다. 저녁 때 돌아와 여관집에 들기 전 바닷가 어느 식당에 들려 싱싱한 생선탕으로 저녁을 들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장공은 “오늘 같이 한가로운 날은 자기 생전에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고 하셨다.
다음 날은 통영에서 배를 타고 두 시간 가량 다도해 남쪽 끝 섬 비진도에 이른다. 우리는 모두 처음 가는 곳이다. 섬 이름조차도 처음 듣는 섬이다. 해수욕장으로 으뜸 가는 섬이라 했다. 처음 듣는 이름, 처음 가는 곳은 언제나 미지의 신비가 미혹한다. 우리는 그 신비에 매혹 되여 무작정 찾아갔다. 바다와 모래는 참으로 좋은데 머물러 쉴 주막이 없었다. 요새는 그런 곳에도 민박이다 하여 머물 곳이 있는데 그 때는 민박이란 말조차 없을 때다. 우리는 거기서 한 이틀 간 머물 생각으로 갔는데 쉴 곳이 문제였다. 부둣가에 서 있는 그 마을 사람에게 쉴만한 곳을 찾으니 그 분이 마침 그 곳 국민학교 분교의 선생님이라 우리를 국민학교 분교로 인도하는 것이다. 교실 한 칸 짜리 분교다. 선생님은 우리를 이 교실에 자리를 만들어 드릴터이니 여기서 쉬고 가시라고 했다. 학생들의 책상 걸상을 벽 쪽으로 미뤄놓고 사무실에서 군대 담료를 몇 장 들고 나와 마루바닥에 깔아 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창문을 열어 놓고 시원한 바닷바람에 몸을 식히면서 편안한 하룻밤을 자게 됐다. 아직도 전쟁에 피묻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을 때라 그 곳까지 수영을 즐기려고 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절해고도, 무인도에 닿은 난파선 선객 같은 기분이다. 우리는 거기서 그 다음날도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그 적막함이 우리에게는 외로움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선을 헤매며 도망쳐 다니던 패전병 같이 전쟁의 참화 속을 헤치며 살아왔던 우리에게 그지없이 한가로운 쉼임의 시간 같아 고마웠다.
다음은 우리들의 만유 마지막 코오스다. 거기서부터 배를 타고 바닷속에 줄이어 점점이 솟아 있는 섬과 섬들을 돌아보았다. 육지에 올라 버스를 타고 산을 돌고 계곡을 가로지르며 평생 처음 보는 마을들과 산천, 그리고 푸른 바다의 신비를 만끽하면서 거재도 장승포에 이르렀다.
이 밤이 만유 마지막 밤이라 싶어 여관을 정하고 여기에 피난을 와 있는 신애균 여사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는 장공과는 동년배의 여자 친구요 그의 둘째 아들 현영학은 岩山과 나의 막연한 친구간이니 어색함은 없었다. 그녀는 여기에 피난을 와 있으면서도 천막학교를 세우고 피난민 아이들에게 공부를 하게 하고 또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우는 아이들을 모아 고아원을 세워 그 자신의 애기 엄마처럼 돌보고 있는 여장부시다. 연락을 받은 신애균 여사는 곧장 우리에게로 달려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또 저녁 식사도 함께 했다. 그 날 저녁은 달도 어찌나 밝은지 우리를 여관방에서 쉬도록 버려 두지 않았다. 매끄러운 자갈돌밭에 앉아 숨결을 죽인 물결에 발을 잠그고 우리는 또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 날 밤은 네 사람이다. 岩山주)이 장공에게 질문을 던졌다. 연애를 해 본 일이 있었는가? 술을 마셔 본 일이 있었는가? 지금 사모님(옛날 시골 할머니)과의 애정관계는 어떠하신가? 장공은 그 문필력으로 보아 작가가 되어도 성공하셨을 터인데 문필가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는가? 등 거리낌없이 물어보았다. 장공이 평소 암산을 좋아한 것도 암산의 이 거침없는 삶의 스타일 때문이었다. 장공은 자기가 스무살도 더 넘어 기독교에 입신하기까지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운 평범한 일반인이었다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음식점에 가면 곁에서 술 마시는 사람들의 술 냄새가 유혹이 된다 하셨다. 담배는 아주 흥미가 없다 하셨다. 자기도 작가가 되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작가가 되려면 생활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없어 않된다고 했다. 그가 “생활이 없어” 하는 말은 작품 속 인물들을 묘사하는 그 생활 체험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연애의 감정이야 왜 없겠느냐 하면서도 구체적 대답은 없었다. 자기 부인과의 관계는 “옛날에야 얼굴 못 본 여자하고 결혼하는데 거기 정 있고 없고 있어? 그래도 오래 함께 살다 보면 그런대로 살 수 있어 헤헤! 하는 대답이었다.
장공의 초기의 문장, 즉 30대의 문장은 수필, 논문 할 것 없이 그 문체에 기름이 흐르고 그 문장에서 생생한 향기가 풍겨 나온다. 전에 소설가 김동리는 몇 번이고 장공은 문학을 했으면 춘원, 이태준 등과 어깨를 겨눌 문필가가 되었을 것이다 고 말했다.
장공은 신학자요, 교육자요, 사상가요, 또 진실한 목사였다. 장공의 외양을 감싸고 있는 품격은 20대 초반까지 다져진 유교 선비의 온화하나 꼿꼿한 성품이 그 후 교사로서도 그의 인생에 그대로 이어졌고 또 그의 목사 인생도 그러했다. 그러나 장공이 타고난 속살 인생의 재질과 감성으로는 작가 문필가로서 으뜸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