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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空의 필생의 사업

성서와문화 2009.12.23 19:49 조회 수 : 1631

 
[ 작성자 : 노명식 - 전 한림대 교수, 역사학 ]

 

장공 탄생 백주년을 맞아 그를 기념하는 행사들이 여기저기서 추진되면서 그가 한평생 가르치시고 또 친밀히 교제하신 많은 이들에 의해 그의 이모저모가 다각적으로 조명될 것인데, 내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만한 자리가 어디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본 끝에, 그가 무엇보다도 가장 이루기를 바랐던 필생의 사업이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사업이 과연 얼마나 이루어졌을까를 내 나름대로 평소 막연히 생각해 오던 것을 한번 정리해 보기로 하였다.
장공이 가장 이루기를 원했던 일은 그가 미국유학 시절(1928. 9--1932. 5)에 송찬근, 한경직과 함께 “한국교회를 세계수준으로 밀어 올리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신학교육의 수준을 향상시켜야 하니, 학업을 마치는 대로 귀국하여 함께 신학교육을 하기로 굳게 맹약(盟約)한” (김재준 “범용기”, 도서출판 풀빛, 1983 참조) 그 신학 교육사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 세 청년 신학도들은 귀국 후에 가르칠 전공까지도 분담하여 송찬근이 목회신학, 김재준이 구약, 한경직이 신약을 각각 맡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일본 식민지 조선의 사정과 한국교회의 형편은 그들의 뜻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송찬근과 한경직은 교회의 목사로서 목회를 하였고, 장공은 평양과 만주 용정에서 중학교 성경교사를 하다가 40년대에 들어 서울로 와서 조선 신학원을 세워 신학을 가르쳤다. 이 신학교는 제 교사(校舍)조차 없는 매우 미미한 존재였는데도 일제의 간악한 술책으로 문을 닫게 되어, 하는 수 없이 강습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서 계속 가르쳤다. 그런데 강습소는 매년 새로 총독부의 인가를 얻어야 했으므로 인가 신청을 냈으나 좀처럼 인가를 내주지 않다가 한참 뒤에 가서, ‘다시는 인가 안 할 방침이니 이것으로 마감인 줄 알라’는 조건부로 인가를 내주었다고 한다. 그것이 해방 일년 전의 일이다.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그 세 사람 중에서 일제시대에 목회를 하지 않고 성경과 신학을 가르친 사람은 장공 뿐이었다. 이 사실은 장공의 필생 사업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해방이 왔다. 세 사람은 당장 서울에 모였다. 미국에서 맹약한 바 신약교육을 하기 위해. 그들은 일본인 적산(敵産) 건물들을 접수하여 서울역 건너편 동자동에 조선신학교와 성 바울 교회를 세워 송찬근이 교장 및 당회장을 맡고, 지금의 영락교회 건물에 여자신학교와 베다니 교회를 세워 한경직이 교장 및 당회장을 맡고, 지금의 경동교회 건물에 성 야곱교회를 세워 장공이 당회장을 맡는 한편 두 신학교의 교수를 겸임하였다. 세 교회의 이름에는 각각 바울과 같은 신학자 양성에 각별히 힘쓰는 교회, 여신도의 교회봉사에 각별히 힘쓰는 교회, 야곱처럼 행동의 신앙을 강조하는 교회로 특성있게 발전시키려는 세 분의 한 뜻이 담겨져 있었다. 이처럼 그들은 신학교육 못지 않게 교회를 중요시하였는데, 그 까닭은 그들의 궁극적 목적은 한국교회를 세계 수준으로 밀어 올리는 것이었고, 자유로운 신학교육의 향상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목적과 방법의 일치이다.
그들의 사업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그러나 6.25전쟁은 그 사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송찬근이 공산군에 납치되어 순교함으로써 이제는 장공이 혼자 신학교 재건에 전력을 기우려야 했다. 한경직은 6.25 후 목회자로서 한국교회사에 큰 자취를 남기었으나 신학교육에서는 손을 떼었다. “자유로운 신학교육의 향상”에 몸바치기로 한 맹약을 계속한 사람은 장공 뿐이었다. 그는 외롭게 고군분투해야 했고 이제 모든 것을 새로 출발해야 했다. 그가 모든 것을 새로 출발한지 10여 년 후 그리고 세 사람이 맹약한 사업을 함께 시작한지 약 20년이 지나, 그가 신학교에서 은퇴한 60년대의 한국교회는 아시아 제일의 교세를 자랑하는 세계 수준으로 올라서 있었다. 세 청년 신학도들이 한국교회를 세계 수준으로 밀어 올려야 한다고 맹약 했을 때에도 또 해방 직후 그 사업에 착수했을 때에도 한국교회가 이처럼 속히 급성장 하리라고는 미쳐 기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릇 교육을 통한 사회적 수준의 향상이란 것은 점진적으로 되는 것이지 결코 단시일 내에 눈에 띄는 성과를 기대할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서 신학교육을 통한 교회성장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 사람이 신학교육의 향상을 통해 한국교회를 세계 수준으로 밀어 올리려는 계획 역시 장기 계획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로서의 한국교회는 단시일 내에 급성장하였다. 그렇다면 이 급성장의 주요한 원인이 신학교육의 향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잠정적 결론을 뒷받침해 주는 하나의 사실은, 장공이 한평생 심혈을 기울인 신학교는 “자유로운 신학교육”과 그 “향상”에 있어 어느 신학교보다도 앞서있다고 자타가 공인(共認)한 신학교였는데……적어도 그가 가르치고 있었던 때에는……그 신학교가 배출한 목사들이 중축이 되어있는 기장(基長)이 한국 개신교의 여러 교파 중에서 교세가 가장 약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교세와 교회수준이 반드시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장의 교세가 그 자유로운 신학교육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다른 교단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사실은 신학교육의 수준과 교회수준이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교세의 강약(强弱)에 괘념치 않고 오직 신학교육의 향상에 매진할 따름이라는 교훈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사실은 “자유로운 신학교육”의 “자유”에 대해 지난 수 십년 간 기장 교단 안에서 장공의 뜻과는 전혀 달리 뭔가 잘못 해석되어지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자유로움”이라는 것은 소속교단이나 사회집단 혹은 국가권력 따위의 어떤 외적 압력이나 구속을 받지 않고 다른 분야의 학문들의 연구결과도 존중하면서 양심의 자유에 따라 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지, 개인적인 생활습성과 이해관계나 세속적 사회적 풍조를 따라 편리한대로 해석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은 말할 나위 없다. “자유로운 신학교육”의 자격자는 그의 공사생활이 누구의 눈에도 공정하고 자기자신에게 엄격하고 물질적으로 청렴하고 사회적으로 겸손하다. 장공은 그 자격을 완전히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장로교 안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스스로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 자라면 기본적으로 칼빈주의적 청교도적 정신과 생활기율에 스스로 엄격해야 하고 그 공사생활이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자유 신학이니 자유주의 신학이니 신 신학이니 하는 그 개념이 극히 애매모호한 이름 아래 공사생활이 세속주의에 빠져서 세상사람들의 빈축을 사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이끄는 교단이 어찌 착실히 성장할 수 있겠는가.
현대 교계와 신학계의 중요한 역사적 과제의 하나가 교회와 신앙생활의 세속화이다. 그러나 그 세속화는 결코 세속주의화(世俗主義化)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런 면에서 장공의 공사생활은 만인의 모범이었다. 그리고 그의 신학은 관념적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인격과 생활의 혁명을 요구하는 매우 구체적이고 준엄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장공상(長空像)이 세속주의가 날로 더 심해 가고있는 오늘의 한국 교계에 그의 탄생 백주년을 맞아 새 바람을 일으켰으면 하는 생각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