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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인간의 참 모습을 보게한다

마이대니 2009.12.23 19:45 조회 수 : 1819

 
[ 작성자 : 박영배 - 신학 ]
 
‘신학은 인간학이다’라는 말은 하느님을 바로 아는 것이 인간을 바로 아는 것이며, 동시에 ‘인간을 바로 아는 것이 하느님을 바로 알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인간을 어떻게 보며 이해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회와 문화 이해에 큰 과제이기도 하다.
흔히 사람들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며 척도’ 라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견해는 인간을 모든 존재의 중심으로 보려는 인간주의적인 판단의 소산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희랍적 사고와 함께 동양적 사고방식 속에도 오래 전부터 널리 퍼져 있는 사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서는 인간을 만물의 척도나 궁극적 존재의 중심으로 보지 않고 하느님을 그 척도의 중심으로 본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로 보게 된다.
그러기에 성서에서 말하는 인간의 타락의 문제는 하느님의 뜻을 배반하고 하느님의 자리에 인간을 대치하려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타락의 궁극적 의미는 인생관과 세계관의 전도(顚倒)를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신론자들은 인간 자신을 모든 것의 궁극적 척도로 군림하게 했다.
사실 현대의 휴머니즘과 과학 지상주의자들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인간 스스로를 인간과 세계의 해석 자로 삼아 왔다. 그리하여 인간을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이 세계를 배회하는 방랑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독교와 성서적 진리는 이런 식의 휴머니즘이나 과학 지상주의자들에게 정면으로 도전한다. 따라서 인간을 가치의 기준이나 척도로 삼는 여하한 견해도 거부한다.
사람들은 성서적 인간관은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서적 인간관은 인간을 과소 평가하며 인간의 영광을 빼앗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인식하려는데 있다.
칼빈은 그가 쓴 ‘기독교 강해’ 첫머리에서 “하느님의 무한성을 아는 자는 인간의 유한성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하느님의 전능성을 아는 자는 인간의 무력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고 고백하고 있다. 즉 하느님을 바로 아는 것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참 모습을 보게 되는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적 인간 이해란 인간에 대한 부당한 평가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의 올바른 인간 이해에 이르게 하자는 것이다.
로마서 3:23-24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죄로 인하여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다 죄로 인하여 사람됨의 인격을 상실하였으므로 자연적인 인간 상태로서는 인간의 본래적 모습을 보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는 한결같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인간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우리와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신앙의 눈을 갖지 않고는 보아 낼 수 없는 세계이다.
실로 믿음은 인간이 인간 됨을 정직하게 인식하며, 스스로 인간임을 넘어서려는 온갖 망상에서 자유케 하며 해방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