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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를 굽는 마음

마이대니 2009.12.23 19:45 조회 수 : 1787

 
[ 작성자 : 이종수 - 도예가 ]

 

도자기를 굽다 보면 간혹 주변 사람들이 ‘한 가마 구워내면 몇 퍼센트나 살아 나오느냐’고 묻곤 합니다. 하지만 이 물음은 도자기를 굽는 사람마다 보는 눈에 따라 큰 차이가 나는 것이므로 한 마디로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10퍼센트를 골라냈고 또 어떤 사람은 20퍼센트를 혹은 40퍼센트, 50퍼센트를 그리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60퍼센트 내지는 80퍼센트에 이르기까지 제각각 선별하는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만든 작품을 스스로가 선별하면서 후한 점수를 주면 작품수가 늘어나게 될 것이고 그와 반대로 눈에 차지 않는다고 더욱 엄격히 판정을 내린다면 그 만큼 작품 수는 줄어들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듯이 작품의 생사를 가르며 작품 수를 늘리고 줄일 수 있는 심판관은 어디까지나 제작자의 안목에 달린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도 또 다시 죽고 사는 문제에 부딪치는데 이미 출가한 것이므로 이번에는 세인들의 눈에 따라 오래오래 극진한 사랑을 받을 수도 있고 거꾸로 눈총을 받다가 마침내는 영영 생이별을 고하는 수도 있게 됩니다.
말하자면, 그 만큼 세상의 눈은 엄격한 것이어서 언뜻 보기에는 어수룩한 데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부딪쳐 보면 용서가 없습니다. 우선은 그럭저럭 너그럽게 잘 보아주는 것 같고 일시적인 눈가림도 통할는지 몰라도 결국은 흘러가는 세월과 더불어 작품의 정체도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공들여 만들어 놓은 도자기가 아깝다는 이유만으로 살려준다고 해 보십시오. 가마에서 나온 작품의 수는 올라가겠지만 요즈음처럼 하루가 다르게 만연해 가고 있는 잡다한 오염물들과 더불어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질서를 어지럽히고 문란케 하는데 한몫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면서 도리어 예술의 질을 높여주지는 못할 망정 시각적인 공해마저 불러일으킨대서야 이 또한 추악한 죄악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눈에 거스르는 어정쩡한 작품을 속시원하게 깨어버리는 편이 옳다고 믿어, 부수고 또 만들고, 또 다시 부수고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내 자식 같은 작품을 그저 못났다고 두들겨 부순 죄, 엄청난 살상 자로서의 죄책감을 감출 수 없답니다.
지금 당장 이 순간에도 저 가마 속에 들어 있는 기형들이 마치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 있는 아기와도 같은데 머지않아 바깥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날이면 여지없이 즉석에서 박살이 날 작품을 생각하면 이래도 저래도 피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더욱 절감케 합니다. 나는 여기에서 정중히 무릎을 꿇고 주님께 용서를 빕니다. 그리고 특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이처럼 큰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자칫 잘못하였으면 그런 죄가 있는지도 모르고 의기양양하게 뻔뻔스럽게 살아왔을 나에게 참으로 죄가 많다는 것을 알고 선뜻 시인하면서 용서를 빌 수 있도록 희미하게나마 눈뜨게 하여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이미 지나간 옛날에는 무작정 눈이 부시도록 잘생긴 옥동자가 탄생하게 해달라고 매달려 욕심을 부린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하는 일에도 하느님 나라의 순리에 어긋나지 않게 정성을 다하면서 마지막 결정은 언제나 주님의 뜻에 맡기고 잘못된 점은 그 모두가 다 내 탓인 것을 더욱더 믿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일찍이 주님이 계시는 하늘의 섭리를 이행하지 않으면서 무턱대고 주님께만 잘되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마음부터가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말할 나위도 없이 주님과의 간격을 좀더 가깝게 좁혀나가야 하겠다는 것, 욕심을 버리고 버린 만큼의 빈자리에 은총으로 채워나가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속에서 싹트는 눈이 도자기의 많고 적은 페센트 수에 연연함 없이 순리에 합당한 보상으로 자연스럽게 열매 맺어 나올 것을 믿습니다. 보다 더 다름답고 성스러운, 그러면서도 영원한 작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