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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s it on!

마이대니 2009.12.23 19:44 조회 수 : 1789

 
[ 작성자 : 아랑. 김현옥 - 쎄던 이리노이주립대학 교수, 언어학 ]

 

열 몇 해도 전, 서해안 포트랜드에서 지금 돌아가신 어머니가 손수 지으시는 찬으로 호식하면서 한 여름 동안 게으름만 피우다가 방학도 끝나서, 남 일리노이 직장으로 돌아오던 때의 애기다.
90번 연방도로를 타고 아이다호와 와이오밍의 주 경계선을 막 넘어가려는 참인데 내 낡은 81년 혼다가 기어이 또 말썽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태산같은 걱정이라 더니 아닌게 아니라 내 걱정은 비터 루트 레인지(bitter root range) 고능지대 저 넘어 솟아 있는 록키 산맥의 준령만큼이나 컸었다.
혼다 딜러를 찾아가야 할 형편이라 주유소에 들어가 점원더러 물어 보았으나, 그 고장 사람이 아니라며 대신 전화번호부를 내어준다. 옐로 페이지(yellow page)를 한참 뒤지고 있는데 마침 한 턱수염 친구가 휘발유 값을 치르고 나가기에 그를 잡고 혼다 딜러가 어디냐고 물어 보았다. 딜러는 하나 있기는 하나 오후 다섯 시가 넘었고 게다가 금요일이라 막 문닫을 시간이어서 거기까지 가보았자 헛일일 것이고, 주말은 아예 문을 열지 않으니 천상 다음주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되지 않겠느냐는 대답이었다.
내 절망하는 안색이 딱했음인가 ‘좌우지간에 차 속을 한번 봅시다’하며 엔진 덮개를 열고 기우뚱거리더니 ‘어쩌면 쉽게 고칠 수 있을 것도 같다’고 위로 담긴 말을 한다. 매캬닉은 아니지만 웬만한 것은 자기도 고친다고 하며 연장이 자기 집에 있으니 괜찮으면 따라오라는 것이다.
턱수염의 집은 불과 서너 불럭도 안 되는 곳이었다. 병든 내 차를 자기 집 차고 앞에 세우게 하고는 차고 문을 열고 연장상자를 들고 나와 부지런히 손을 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밖같 인기척을 들었음인지 그 집 안주인과 사내아이가 나와서 헬로 하며 인사를 한다. 일손을 멈추고, 아들 빌은 소학 일년생, 아내 린다는 시청에 다닌다고 한다. 턱수염 장이 톰은 린다가 내온 커피를 권하면서 자기는 그 고장 토건회사에 근무하고 있지만 원래 태생은 오클라호마라고 깊은 바리톤 목소리로 일러준다.

 

한 시간은 족히 걸렸을까, 한결 부드러워진 엔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이 정도면 당분간은 견딜 것이라고 하는 톰에게 사례의 표시를 어떻게 하나 망설이다 우선 쌈지 돈에서 20불을 꺼내 주려는 나를 한사코 말리며, 그는 덥수룩한 수염 밑으로 “Pass it on !”한다. 그 것 한번 묘한 소리구나. 자기에게 갚을 것이 아니라 후에 딱한 사람을 만나거든 그가 내게 한 것같이 베풀어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마다하는 그에게 20불을 차창 밖으로 차고 앞마당에 내던지고는 다시 길을 떠났다. 이 사마리아인의 공들인 응급치료도 별 수는 없었음을 얼마안가 알게 되었고, 다시 앞을 가리고 다가서는 록키 산줄기에 가슴이 또 무거워지기 시작은 했어도 마음은 마냥 즐겁기만 하였다. “Pass it on!”하던 톰의 약간 남부 토박이 억양이 섞인 한마디가 자꾸만 내 머리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남의 신세를 지면 그 은혜를 갚아야 하고 빚을 지면 기한 안에 상환하여야 한다. 부채를 갚는데도 여러 방법이 있겠다. 가슴을 펴고 흥정까지 할 수 있는 속 시원한 현금 결재도 있겠고, 나 같은 가난뱅이가 울며 겨자 먹기로 곧잘 애용하는 장기 월부제나 백화점의 이른바 레이아웃(layout), 나중이야 어떻게 되든 우선 손쉽게 그어댈 수 있는 크레딧 카드 등등 가지가지겠다. 먼 외국 땅에 가서도 우편으로 수표를 보내면 코레스폰덴스 은행을 통해 지불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플라스틱 카드 하나면 사하라 사막에서 산 물건값이 뉴욕의 은행에서 현금결재가 된다. 그 뿐인가. 지구를 덮고 얽히고 설킨 전자 거미줄을 타고 어마어마한 돈과 물량이 순식간에 오가는 오늘날의 세상이다.

 

신용을 바탕으로 한 유통경제가 서지 못했던 옛날이고 보면 불가불 부채의 청산은 채권자와 채무자간의 단순한 일대일의 직접적인 거래일 수밖에 없었겠다. 부채를 인편으로 위탁전달 할 수는 있었어도 채무자 갑이 채권자 을에 대한 빚을 제삼자인 병에게 갚고, 그 제삼자가 갑과 을 사이의 채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을과의 거래를 통해 병이 을에 대한 빚에서 갑과 을의 채무 액만큼을 공제할 수 있는 금융시스템이 확립되기 까지는 상당한 경제구조의 발달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일대일의 물물교환이 고작이던 때는 본이 아니게 남의 돈을 빌려가서는 갚지 못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산 넘고 물 건너 가야하는 타향에 살다보면 영락없는 배은망덕자가 되기가 일수였을 것이다. 그런 시대에 진작 우리 텁석부리 톰의 Pass it on의 묘한 결산방법이 있었던들 세상은 한결 살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하기야 생각해 보면 Pass it on의 상환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보복이란 모습으로는, 그러니까 원수를 갚는 수단으로는 우리에게 결코 낯 설은 원리가 아니었다. 원수는 세대를 넘어서도 어김없이 갚아야 했다. 능지처참이 행해지고, 로미오와 쥴리엣의 비극은 되풀이되고, 중동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끝일 줄 모른다.

 

그런데 욕설이나 돈을 매개로 한 부채의 청산을 통해서 만이 아니라 남에게 받은 은혜를 또한 이 희한 절묘한 Pass it on의 상환 시스템으로 갚을 수 있음을 손수 가르치신 분이 이천 년 전 나자렛의 그 분이 아니었던가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사흘 동안 털럭거리며 말썽을 부려가면서 그래도 일리노이 대 분지까지 별 큰 탈없이 돌아와 주어 고맙기는 하였지만 역시 그 헌차는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 좀 서운한 마음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