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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모 선생의 추억

마이대니 2009.12.23 15:39 조회 수 : 1404

 
[ 작성자 : 장기홍 - 지질학 ]

내가 서울YMCA에서 열리던 유영모 선생의 집회에 처음 참석한 것은 6·25직후(1954년 봄)였다. 모두가 도탄에 빠져 어디에 살 길이 있나 하는 갈망의 분위기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이의 키가 5척 단신이기 때문에 청중들은 허리를 펴고 앞사람 뒤통수를 피해가면서 말씀을 들어야 했다. 청중은 늘 백 명 미만이었으나 앞자리에는 함석헌, 김흥호 등 미남들이 앉아 있어서 그의 강의는 돋보였다.
그는 스스로 多夕(다석)이라 했는데 날이 저물고 해가 저물고 인생이 저무는 그 많은 저녁때를 연상케 하는 멋진 아호다. 다석은 1880년 생이시다. 대학을 다닌 학력은 없으나 이북의 오산학교에서 교사, 교장을 지났으며 기독교인으로 출발하여 사서오경과 노장(老莊)에 통달했고, 반야심경과 금강경도 강의했다.
다석은 信天(함석헌 선생의 아호)보다 십년 연상이며 오산학교 때부터의 대선배이므로 늘 신천은 다석을 선생님이라 불렀다. 두 분 다 장시간의 강의가 특징이어서 두 모임에 다 참석하다 보면 그 부담은 대학을 하나 더 다니는 것만큼이나 되었다. 1963년 우리 결혼식 때는 유 선생님이 주례를 서셨다. 결혼 후 나는 곧 대구로 내려갔으므로 유선생님은 자연히 자주 뵙지 못하게 되었다. 다석의 공로의 하나를 꼽자면 그의 한글이다. 그는 노자와 반야심경 등 고전을 순 한글로 번역했는데 그것을 읽으면 그의 진면목에 접하게 된다. 그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 점과 선을 가지고 여러 개념들을 순 우리말로 표현했다. 中庸(중용)을 '가온찍이' 그리고 민중을 '씨알'이라 했다. 그는 또 숫자의 신비주의자이기도 했다.
어느 하루 그는 0(제로)이 많이 달린 숫자를 칠판에 쓴 다음 자신이 그만한 날수를 산 날이 곧 닥친다고 하면서 그 날 자신이 죽으리라 했다. 그가 돌아가시면 어쩌나 싶었으나 아무도 그를 말리는 사람은 없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날이 되자 그의 문도들은 그가 어떻게 죽는지 구경이라도 하자는 듯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는 넉넉히 살아서 묵은 자신은 죽었고 이제 태어난 자신은 새로 산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그러면 그렇지” 하고 안심했다. 그 전이나 후나 그는 하루하루 성자의 생활을 했다. 그는 나이 사십대부터 이미 사모님과 동침하지 않았다. 그는 통나무로 된 두꺼운 판때기 위에서 혼자 잤다. 그는 손수 자기 골격에 맞게 통나무를 팠다. 그는 '는지름'(성생활)을 끊기만 하면 건강의 염려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유선생님 집을 방문하자면 자하문과 세검정을 지나 더 교외로 가야 했다. 하루는 중간에서 그와 마주쳤다. 마침 큰 반석이 길가에 있어서 그이는 나더러 올라가 앉자고 했다. 마주 않은채 많은 말씀이 있었으나 늘 듣던 바기 때문에 특별히 기억되는 것은 없으나 내가 불쑥 주역을 배워 봤으면 싶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난다. 그는 “주역은 배와서 무엇 하느냐”고 했다. 배울 가치가 없다는 뜻이 아니고 깨달음에는 반드시 주역이 아니더라도 된다는 뜻이었으리라. 혹시 주역을 배워 점을 친다든지 하는 옆길로 흐를 것을 우려하셨는지 모른다. 주역을 배우자던 그 때의 발심은 은퇴한 후에야 유효하여 나는 요즘 매주 주역공부의 모임에 나간다.
多石과 信天의 세계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니던 나에게는 유별난 것으로 비치었다. 그들은 성경을 포함하는 세계의 경전들에서 자유자재로 인용하여 독자적으로 가르쳤다. 어떤 교리에도 메이지 않고 진리만을 추구하시던 그들의 자유로운 태도는 지금도 내 안에서 살아 생동한다. 그들은 종교다원주의를 넘어서서 “종교는 하나”임을 가르치고 있었던 셈이다. 그만큼 그들은 시대에 앞섰었음을 그들 자신 얼마나 의식했을까? 나 자신 어쩌면 구경꾼 같던 몹쓸 문하생이지만 나는 근래 마침내 다석과 신천이 세계의 종교사상 뭇 종교를 통일적으로 보고 그렇게 살았던 사상가였음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