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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의 스승 세분

마이대니 2009.12.23 15:38 조회 수 : 1203

 
[ 작성자 : 노명식 - 전 한림대 교수, 역사학 ]
 
지난 4월 한경직목사님의 소천(召天) 소식에 접하는 순간 나는 맘속에서 중얼거렸다. “이제는 내 신앙의 스승 세 분이 다 돌아가셨구나!” 내게는 신앙의 스승이 세 분 계셨다. 그 분들은 학교에서 글을 배운 선생님들도 아니고, 각별히 가까이 모시면서 가르침을 받은 분들도 아니고, 다만 짝사랑하듯 혼자 맘속에서 신앙의 스승으로 우러러 모신 분들이다. 한경직, 김재준, 함석헌이 그 분들이다.
일제 말기에 한목사님은 일제의 탄압으로 목회를 그만두시고 양로원을 겸한 보린원이라는 조그마한 고아원에서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과 고아들을 돌보시고 계셨는데 그 보린원이 마치 새로 이사온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았다. 그때까지 나는 그 분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으나 이제 한 동네에 살게 되면서 피차 서로 알게 되었다. 그는 주일이면 우리 동네 교회에 참석하셨는데 뒷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는 조용히 돌아가시곤 하였다. 그에게는 설교는 물론이고 기도도 금지되어 있었다.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하루는 우연히 목사님이 지게꾼의 뒤를 따라 근처의 공동묘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유심히 보니 지게에 실린 짐은 시신을 담은 관이었다. 엊그제 보린원에서 죽은 노인을 매장하러 가는 길이었다. 보린원에서 타계한 노인들의 유일한 호상이 한목사님이었으니까.
드디어 해방이 왔다. 첫 주일의 우리 교회 설교는 한목사님이 하셨다. 여러 해만에 하는 첫 설교! 야고보 1장 15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성장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일본이 욕심을 잉태하더니 침략의 죄를 낳고 그 죄가 성장하더니 드디어 멸망을 낳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설교를 평생 잊지 못한다. 그런데 한목사님은 일본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욕심이란 터럭만큼도 없는 분이었다. 지난 4월 목사님이 돌아가시자 우리나라 신문들이 그분의 생애는 저금통장 하나 없는 완전 무소유의 삶이었다는 것을 보도했을 때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왜 놀라지 않았나? 일찍이 그가 30대 초에 신의주 제2교회 목사로 시무하고 있었을 때의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모님이 교회의 재정담당 장로를 찾아가서 다음 달 봉급을 미리 좀 달라고 했단다. 처음에는 돈 쓸데가 생겨서 그러는가 보다 했는데 자주 그러는 것 아닌가. 이상히 여긴 재정장로가 조용히 사정을 알아보니 목사님이 월급봉투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불쌍한 사람이나 고학생 등을 만나면 그냥 꺼내 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생활비가 늘 모자랄 수밖에. 거기서 그후부터는 봉급을 사모님에게 직접 드렸다는 이야기다. 내가 목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44년 봄이었다. 그의 나이 아직 40대 초반이었는데 내게 비친 그의 인상은 정신적으로 원숙한 성자의 풍모였다.
해방이 된 지 두 달 후 나는 그간 중단됐던 학업을 계속하려고 서울에 왔다. 나보다 조금 일찍 상경하신 목사님을 찾아뵈었더니 통의동의 어느 여관에 가면 강원용이라는 청년이 있으니 그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일을 같이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한 결과 나는 그해 겨울 현재의 경동교회 옛 건물의 관리임무를 조향록목사와 함께 맡게 되었는데, 12월 첫 주일에 열 두 사람이 거기서 예배를 드린 것이 경동교회의 출발이었다. 그렇게 하여 김재준목사님을 거기서 만나게 되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 분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으나 그의 설교는 내 맘을 확 끌어당겼다. 그 설교에 끌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한목사의 영락교회 교인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어쨌든 경동교회의 고정멤버로 정착해 가는 가운데서 나는 김목사님을 개인적으로도 접촉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이 역시 한목사님처럼 욕심없는 무소유의 신학자였다. 6.25후 여러 해 나는 대구에서 산 탓으로 김목사님과의 접촉도 다소 소원해졌으나 서울로 다시 돌아온 후에는 목사님이 주관하신 잡지 <제삼일>과의 관계로 비교적 자주 자리를 같이할 기회가 있었다. 하루는 단 둘만의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셨다. “독재에 항거한다고 꼭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어. 그러나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 교회마저 그래선 안돼. 교회는 입을 다물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후세에 알려주어야 해.” 나는 그에게서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풍모를 발견하였다. 그 분은 민족의 구원을 위해 위험을 무릅쓴 예언자이며 개혁가적 신학자이며 입설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내가 함석헌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된 것은 해방 직후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교육부장으로서의 그였다. 그가 일본어로 수업하는 것을 거부하여 오산의 교원을 그만두고 고향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고 또 그간 몇 번이나 옥에 갇히었던 애국자라는 것을 그때에야 비로소 가형에게서 듣고 알았다. 형님이 왜 그때까지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을까. 일본당국에 찍혀 있는 사람에 대한 말 자체가 위험하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그러한 애국자가 45년 11월 하순에 일어난 신의주학생사건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그의 생에 다섯 번째의 옥살이를 해방된 조국 땅에서 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접했을 때 나는 이 역사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하여 함석헌이라는 이름은 해방 후 서너 달 사이에 내 뇌리에 깊숙이 자리잡게 되었다.
6.25때 피난 가있던 대구에서 뜻밖에도 그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발견하였다. 그 책이 주는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그 글이 실은 이미 1934~5년에 선생의 나이 30대 초반에 <성서조선>에 연재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더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선생이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였고 오산에서 역사를 가르치셨다는 것도 그때에야 비로소 알았다. 역사를 공부하는 나로서는 새삼 친근감을 느끼었고 또 그의 독특한 역사관에도 각별한 관심이 갔다. 그보다 몇 년 전에 경동교회에서 김재준목사님이 학생들에게 강의해주신 토인비의 역사관 역시 매우 독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두 역사관 사이에 혹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 엉뚱한 생각이 30여 년 후에 토인비와 함석헌의 고난사관을 비교한 내 논문으로 구체화되었다. 그 논문을 선생님에게 보내드렸더니 선생님이 그 논문을 열심히 읽으셨다고 한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선생님을 직접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나는 선생님 글을 좀 읽기도 하고 강연을 더러 듣기는 하였으나 직접 만나서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얼마 후 <씨알의 소리>가 복간되면서 그 편집위원의 한 사람으로서 비교적 자주 뵈올 기회가 있었다.
함선생님 역시 세속적 욕망이란 터럭만큼도 없는 완전 무소유의 인격자이시다. 그는 20세기 한국의 고난의 역사가 낳은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서 다가오는 새 시대가 갈망하는 새 종교의 비젼을 이미 보시고 그 비젼을 우리에게 가르치느라 노심초사하다 가신 분이다. 그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위를 향해 올라가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영원의 구도자였다. 영원의 구도자! 이 혼돈의 시대의 지성과 영성(靈性)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구도자적 자세가 아닐까.
이상 세 분은 한국개신교계의 지도자로서 그 풍모와 활동의 영역 및 스타일이 같지 않지만 그 인격에 있어 공통된 것이 있다. 완전 무소유 즉 물질, 명예, 지위, 감투와 같은 세속적 욕망의 전무(全無),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 겸손, 그리고 속과 겉이 다른 위선과 외식이 전혀 없는 진실성이 그것이다. 나는 그 분들의 신들매를 풀기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러기에 오히려 더 그 분들을 나의 신앙생활의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