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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결한 마음과 평화

마이대니 2009.12.08 16:31 조회 수 : 1546

[ 김성환 - 전 영동세브란스병원 원목, 임상상담학 ]  


환자를 대하다 보면 대개 두 부류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공포의 얼굴과 평화의 얼굴’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대부분의 경우는 괴로움과 공포의 모습이다. 임종을 앞둔 환자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많이 있다. 질병을 자기 삶의 일부로 여기며 죽음마저도 이미 준비하고 있는 환자들이다. 잔잔한 미소를 먹음은 그들의 얼굴은 평화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담담하게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성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환자들과 함께 하는 시간만은 그 ‘평화’가 전이(轉移)되어 오는 듯하다. 우리 삶의 목표는 그런 성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네 교회에서의 선교 전략 중에 환자 목회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환자의 교인화’에 있는 것 같다. 심신의 괴로움으로 사면초과가 되어 있을 때 ‘신유(神癒)’라는 미끼로 ‘교인’이 되게 하는 것이 쉬운 전도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오히려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목회가 바람직하고 성숙하지 않을까.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그분이 주시는 ‘평화’를 얻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글에서 마태복음 5장 8절의 말씀 해설을 읽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길’은 ‘마음 청결’인데, ‘마음의 청결’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욕심’이라는 것이다. 소유욕, 명예욕, 정욕 등 욕심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파도처럼 밀려와서 우리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든다. 그런데 ‘청결한 자’로 번역되는 원어는 ‘hoi ka-tharoi’로서 ‘고요한 상태’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결국 ‘마음이 청결한 자란 욕심으로 인해 마음이 출렁이지 않는 상태’, 즉 ‘고요한 상태’라고 한다. 이러한 상태를 ‘평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하나님을 만나 마음의 평화를 체험했던 경험이 있다. 1984년 7월, 병원 목회활동이 왕성했던 시기에 ‘위암 진단’을 받았다. ‘암’이라는 진단이 내려지는 순간 앞이 캄캄해져 오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혹 꿈이겠지 생각해 보려고 했으나 분명한 생시였다. 생각은 점점 발전해 간다. ‘그렇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한 5년… 3개월… 아니야 이제 입원하게 되면 바로 수술 받게 될 것이고, 수술하는 동안에 의료 사고라도 발생하게 되면 그대로 세상 끝날지도 몰라’ 등등… 잠깐 동안에 불과하지만 생각은 바삐 돌아갔다. 생각의 화면 속에 제일 먼저 비쳐진 것은 이제 머지 않아 과부가 될 아내의 얼굴이었다. 그 다음은 자식들의 얼굴… 그리고는 내 인생을 정리하는 문제에까지 이르고 보니 정말 그 짧은 시간은 턱없이 불가능했다. ‘남에게 진 마음의 빚들, 남의 마음에 상처를 준 일들’, 이런 일들을 불과 몇 시간 동안에 어떻게 정리한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까지 오고 보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 마음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하고 소리쳐 하나님을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하나님”이 필자의 면전에 나타나 주시는 것이 아닌가. 사실 환자 목회에서 설교, 기도, 환자 위로 등을 많이 했었다. 그때마다 입술에서만 오르내리던 ‘하나님의 임재’를 말했을 뿐이었다. 그 ‘하나님’은 교통사고를 당해 피투성이가 되어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에게나 필요한 ‘하나님’, 그리고 사경에서 헤메고 있는 중환자실 환자에게나 필요한 ‘하나님’이었지 나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하나님’이었다. 지금까지는 저 멀리에만 계시는 줄 알았던 그 ‘하나님’이 바로 내 앞에 성큼 다가오셔서 서 계시지 않는가. 그제서야 생각이 떠오르는데 “아하, 내 일들을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모두 맡기자!!”는 생각이다. 내 아내, 내 자식, 내 생명, 내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툴툴 다 털어 버리고 주님께 항복하자는 것이었다. 내 계획, 내 재주, 내 건강, 내 생명까지도 모두 그분에게 맡기자는 생각으로 정리하고 나니까 혼란스러웠던 마음에 ‘평화’가 왔다. ‘하나님’께 모두 맡김과 동시에 세상에 대한 ‘욕심’이 모두 없어져 버렸다. 제물에 대한 욕심, 출세에 대한 욕심, 생명에 대한 애착 뿐만 아니라 남을 미워하는 마음마저 없어져 버렸다. 모두를 용서해 주고 싶고 또 이미 모두로부터 용서를 받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에 죽는다 해도 두려울 것이 없는 이 마음은 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평화’였다. 이런 일들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삶에 대한 지혜를 주신 것이다. <평화로운 마음>은 ‘욕심’으로 마음이 요동치지 않을 때 즉 ‘고요한 상태’에서 ‘평화’가 온다는 사실이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절대자에 대한 전폭적인 항복이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