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00년 성서와 문화

時人 그리고 아버지, 茶兄 金顯承

마이대니 2009.12.08 16:30 조회 수 : 1421

[ 김순배 - 한성신학대교수, 음악 ] 

 

記憶의 가장 重厚한 도시의
밤을 젖게 하던, 음악을 아는 비가,
오늘은 우리들의 도시에 피아니시모로 나린다.
(‘봄비는 음악의 상태로’ 中)

 

지난 봄에도 틀림없이 나는 이 시와 함께 아버지를 생각했었다. 봄비로부터 섬세한 자연의 다이나믹을 느꼈던 ‘음악을 아는’ 시인을.
다가올 가을은 더 말할 것 없는 ‘아버지의 계절’이다. 혹은 그 분의 가을은 지나치게 강조되었을 수 있다. 물론 이는 순전히 가을을 사랑했고 그에 대해 무수히 많은 시들을 쓰신 아버지의 탓이다.
그러나 나는 예컨대 봄을 소재로 한 연한 새순처럼 사각사각 감촉 좋은 시들이나 오염되지 않은 실존주의자의 고백 같은 ‘나의 眞實’, ‘나의 限界’같은 시들이 좋다. ‘나는 꿈이려는 꿈이 아니다’(‘나의 진실’)라든가
‘자유란 기껏
그이와 나 사이에서
헤매는 헤매임이다’(‘나의 한계’)
와 같은 구절들은 영원히 낡지 않을 싱싱한 에피그람(Epigram)이다. 또한 ‘밤은 영양이 풍부하다’나 ‘당신마저도’ 그리고 빛을 넘어 빛에 닿는 단 하나의 빛을 노래한 ‘검은빛’들에 담긴 날카로운 감수성과 통찰력도 나는 한 독자로서 보석처럼 아낀다.

 

육친으로서의 그 분은 내가 지닌 몇 안 되는 ‘아쉬움’의 가장 큰 대상이다. 그 분은 내가 마악 세상과 삶에 부딪혀 눈떠가려는 대학 1학년, 그것도 휘트만의 싯귀처럼 ‘현관 앞에는 라일락이 눈부시게 피었을 때…’ 떠나셨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아버지를 ‘정식으로’ 만나 본 적이 없다는 잠재의식을 갖고 있다. 물론 내 기억의 창고는 아버지에 대한 것들로 넘치고 있지만.
집 대문을 여는 순간 밀려오던 마당에까지 가득 찬 커피향기. 사방 벽이 책으로 둘러 쌓인 아버지의 서재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쓸데없이(?) 기억하게 돼 지금까지도 못 잊는 제목들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 ‘不穩抒情’ 혹은 ‘市場과 戰場’과 같은 시, 소설집들. 아버지의 금고에서 몰래 꺼내 맛보았던 아버지만의 숨겨놓은 간식 - 홈메이드 버터파이와 당대의 禁書 ‘차탈레이부인의 사랑’.
자주 내 손을 잡고 시내의 책방에 가서 책 사주신 후 들르던 광화문 동아일보사 근처의 중국집에서는 나만 자장면을 먹고 당신은 내가 다 먹을 때까지 눈감고 생각에 잠겨 계셨었다.
아버지에 관한 기억의 절정은 중학교 시절의 어떤 사건(!)이다. 집에 가는 버스를 타니 아버지가 저쪽 자리에 역시 눈감고 앉아 계셨다. 나는 모르는 척 그 앞자리에 앉았고 집으로 오는 긴 시간 동안 아버지는 내게 아는 척을 안 하셨다. 버스에서 내려 집에 오는 길에서도 나는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갔고 대문에 도착해서야 아버지는 “응? 너였느냐?”하셨다. 딸을 몰라보는 아버지나 일부러 모른 척 하는 나나 막상막하다.
왜 항상 나만 자장면을 먹었는지 그리고 앞자리에 앉은 딸을 어떻게 몰라볼 수 있었는지 ‘정식으로’ 물어보기 전에 그리고 아버지의 버터파이를 몰래 먹은 것은 나이고 ‘차탈레이부인의 사랑’도 일찌감치 꺼내 읽었노라는 고백을 하기 전에 아버지는 떠나셨다. 그러나 그것들이 내 아쉬움의 진짜 이유는 물론 아니다. 유년기와 성장기에 내 곁에 계셨고 유난히 막내딸을 사랑하셨건만 ‘버스사건’에서처럼 왠지 모르게 나는 아버지를 조금은 어색해 했고 쑥스러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들은 당시의 어린 나에게 일종의 해독할 수 없는 암호 같은 것이었다. 특히 ‘고독’에 관한 시편들은 지금도 다소 그렇지만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또한 자연인으로서의 아버지와 시인으로서의 두 모습 사이에서 가끔 혼란을 느끼기도 했던 나이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이유로 자세히 음미하기를 꺼렸던 ‘가을의 기도’가 무의미했던 암호들이 스르르 풀리듯 밝히 읽히는 요즈음이다. 아버지가 떠나신 후 펼쳐진 삶의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이윽고 다다를 마른나무가지
가 벌써 저만큼 바라보이는 것인가? 그리고 이빨이 안 들어가게 딱딱한 마른 빵처럼만 느껴지던 ‘고독시편’들의 깊은 속살들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 내가 아버지를 예컨대 버스에서 만난다면 지체없이 아는 척을 할 뿐 더러 집까지 가는 동안 당연히 팔짱을 끼고 걷겠다. 이제는 그 분의 인간적으로 다양한 국면들도 너무 잘 이해할 수 있고 ‘정식으로’ 아버지를 만날 자신이 있는데 이미 그 분은 오랫동안 부재중이다.
‘뉘우침은 오랜 罪의 안에서
눈을 들 듯’(“봄비는 음악의 상태로”)
내가 그렇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헤어진 채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너무 불공평하고 억울하다. 다시는 네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은 내 삶의 유일한 위안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가진 최선의 소망이다.”
불치병에 걸린 사랑하는 어린 딸을 먼저 떠나보낸 아버지의 심경을 적은 어떤 글을 읽으며 나는 바로 아버지를 떠올렸었다. 이는 나의 그 분에 대한 상념의 결론이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최적의 방법이다. 어느 눈부신 봄날 제대로 만나보지도 못한 채 아버지를 떠나보낸 그것이 영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나는 절대 수긍하지 못한다.
어떤 절박한 상황에서 나는 이상한, 분명 교리에는 맞지 않을 기도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버지, 그곳에 같이 계실 테니까 하나님께 제 얘기 좀 잘 해 주세요. 그래도 제 걱정은 아버지가 더 많이 하시잖아요? 아버지의 저에 대한 사랑만 믿어요.”
이 정도는 하나님께서도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나는 소망한다. 내 육신의 아버지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는 그 날을.

 

더불어 한 가지 바램은 내가 좋아하는 아버지의 ‘젊은 시’들을 모아 그 시들지 않는 감성과 지성을 오늘 그리고 지금에도 살아 숨쉬도록 할 수 있는 멋진 앤솔로지(Anthology)를 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