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8년 성서와 문화

가슴에 새겨진 태극무늬

 

임인진 (시인)

 

현충일 아침에 조기(弔旗)를 대문 위에 달아놓고 사방을 둘러보니 어디에도 태극기는 눈에 띄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의 충렬정신(忠烈精神)을 추모하기 위해 조기를 달도록 한 법정공휴일이 휴일에서 제외된 뒤로 사람들은 조기 다는 일조차도 귀찮게 여기나 보다. 연초록 깃대에 돌돌 감겨진 기폭을 펼칠 때마다 나는 내 안에서 잠자던 아린 기억 한 자락을 함께 펼친다.

 

영동고속도로에서 봉평터널을 지나 운두령(雲頭嶺) 가는 길로 접어들다 보면 넓은 야생화 꽃밭 뒤 드높이 솟은 깃대 위에서 한껏 펄럭이는 태극기를 볼 수 있다. 거기 야트막한 집 한 채가 있고 나이 아흔 넘은 나의 친언니가 홀로 살고 있다. 누가 뭐라 하든 말든 언니의 태극기는 사시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높은 깃대 위에서 펄럭인다.

언니를 만날 때마다 나는 잘 생각나지 않는 집안 얘기를 귀담아 듣는다. 언니의 태극기 사랑은 오래 전 할아버지 방 갓집 밑바닥에 그려졌던 태극무늬에서 비롯된 것 같다. 언니 가슴엔 그때의 태극문양이 그대로 새겨져 있나 보다.

언니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다.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친 일본인 경찰관이 병원에서 퇴원한 아버지가 누워있는 사랑방으로 신발을 신은 채 들어가더란다. 언뜻 보기에도 예삿일이 아닌 것 같아 언니는 겁에 질리면서도 문 앞에서 지켜봤단다. 그들은 벽에 걸린 갓집을 후려쳐 방바닥에 엎어놓더니 겨우 몸을 일으킨 아버지를 향해 흥분한 목소리로 대들더란다. 그들의 거친 행동을 멈추게 하려고 우리말로 애쓰는 아버지를 보다 못한 언니는 사람들을 밀치고 방안으로 들어갔단다.

대를 이어받은 물건이다. 그림의 붉은빛은 하늘이고 푸른빛은 땅이라는 것 밖에 다른 뜻이 없다.” 는 아버지의 말을 일본어로 똑똑히 전했단다. 말을 들은 채 만 채 그들은 갓집이 으스러지도록 밟아놓고는 가버리더란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언니의 얘기를 듣고 보니, 그 일 이후로 우리가족이 겪은 일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집안을 샅샅이 뒤져 놋화로, 놋대야, 제기까지 몽땅 가져가던 일이며 곡물공출(穀物供出) 등 지겹도록 겪은 수탈과 횡포는 일일이 들춰내기조차 싫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나는 집에서 오빠의 조선어교본만드는 일을 도왔다. 등사기에서 글자가 찍혀 나온 백로지를 차례대로 모아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손끝으로 꼬아 만든 한지 끄나풀로 책을 엮었다. 어느 날, 사람들이 몰려와 등사기와 책, 잘라놓은 백로지며 한지까지 모조리 가져가며 야학당이 폐쇄되었다고 했다.

글 모르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할아버지가 공회당건물을 빌려 세운 야학당이 차츰 학교 못가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배움터로, 야간에서 주간으로 바뀌면서 우리가족이 쏟은 정성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1945,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끝날 무렵이었다. 나는 뒷산 소나무에서 긁어모은 송진이 담긴 성냥갑을 챙겨놓고, 말려놓은 풀 더미(군마용 먹이)를 노끈으로 묶어놓고 개학날을 기다렸다. 저녁 무렵, 마을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우리 집 라디오 앞으로 몰려들었다. 나는 해방이 뭔지, 독립이 뭔지 제대로 몰라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더욱 간절했다. 이튿날부터 사람들은 몰려다니며 만세를 불렀다. 하루 이틀 지나자 손에 깃발을 든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내가 처음으로 본 태극기였다.

며칠 전, 현존한 태극기 중 가장 오래됐다는 광목바탕에 청홍 빛 천을 오려붙여 바느질했다는 태극기를 신문에서 보았다. 고종임금이 외교고문인 미국인 Owen N Denny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주었다는 태극기인데 그의 후손이 보내와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었다고 한다.

청홍색 두 무늬가 원을 그리며 돌아간 태극의 문양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사랑방 갓집 밑 태극문양이 떠올랐다. 예닐곱 살 때까지 할아버지 방에 들락거리면서도 제대로 눈여겨 본 것 같지 않은 갓집의 문양이 눈앞에 선명히 떠올랐다.

 

우주자연의 생성원리를 깨닫게 하는 태극기! 쓰러져가는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으려던 선현들의 이심전심(以心傳心) 어린 태극기! 이웃나라들의 압제와 수탈과 모멸을 참고 견디면서도 남의 나라를 단 한 번도 넘보지 않은 올곧은 애국의 얼!

오늘 우리는 이웃나라들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준엄한 태극기 앞에서 애국의 얼을 힘차게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815, 다가오는 광복절 아침엔 태극기를 높이 달아야겠다. 운두령 가는 길 야생화 꽃밭 뒤 언니네 깃발처럼 높이 달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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