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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사상 - 장기홍

성서와문화 2019.10.03 15:12 조회 수 : 0

구원의 사상: 사랑하면 서로 구세주

- Teilhard de Chardin의 구세주生成論(christogenesis) -

 

장기홍 (경북대 명예교수, 지질학)

 

이웃사랑의 원전은 구약 레위기(1918)인데 이웃을 네 몸 같이 아끼라고 쓰여 있다. 자세히 보면 그 이웃사랑은 동족 간의 사랑이다. 더 나아가 예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힘주어 가르쳤으니(마태 544, 누가 627). 어찌 보면 그이가 지금의 우리 사정을 미리 내다보신 것 같다. 한반도의 우리는 동족이지만 6·25로 적이 된 이래 서로 원수가 되었다. ‘주적(主敵)’이라고도 한다. 예수의 가르침이 지금 우리 앞에 떨어졌다. 비핵(非核)과 인권(人權)이 해결된 다음에는 이웃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로마군에 의한 AD 70년의 예루살렘 파괴와 3년 후의 마사다에서의 비극 그 무렵에 복음서는 기록되었는데,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 이미 132절에 예루살렘 파괴가 예언되어 있다. 최초의 크리스천들은 그 난리 통에도 살아남아 예수의 교훈을 회상하며 사랑에 관해 기록했다. 이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의 학정 아래에서 예수님 사랑을 듣고 무저항주의를 행했던 일을 연상시킨다. 예수가 가르친 원수사랑을 기억하고 실행하려던 다수의 유대인 사상가들이 있었던 것이리라. 무수한 유대인들의 희생의 대가로 대적 사랑의 사상이 태어났다. 오랜 세월의 유대민족의 고난이 낳은 집단적 통찰이다. 우리도 6·25전쟁과 그 후의 오랜 싸움을 통하여 사랑이 최후의 길임을 깨닫는다,

구원(救援). 지질학·고생물학자 테야 드 샤르댕 예수회 신부는 예수는 그 사랑의 권고만으로도 미래 세계의 구세주가 된다고 보았다. 예수를 따르자면 우리는 서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사랑하는 자들은 서로 구세주가 되므로 예수는 우리의 구세주이다. 피정복 유대민족은 늘 구세주를 기다려왔고 지금도 기다리지만 예수 생시는 그 소원의 절정이었다. 그들이 바라던 구세주는 왕이나 혁명가였고 예수 자신이 그런 혐의로 십자가형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 이후로는 정신적 구원으로 승화하여 사랑의 사상이 됨으로써 구원의 세계화가 되었다. 오늘날 세계도 보라. 1, 2차대전과 한국전쟁, 월남전쟁, 이라크전쟁 등을 겪었고 환경파괴와 빈부격차의 고통, 자폭테러와 끝없는 타락과 질병 등 고난으로부터의 구원은 늘 필요하다.

사람의 삶은 악이 넘치는 세상에 던져진다. 그래서 예수는 악에서 구하옵소서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예수 자신 십자가에서 끝내 악에서 구출되지 못한 채 그 몹쓸 못 박히는 고통을 당하셨다. 유대인들은 세계역사에서 구원사상의 전담 민족이다. 오늘날 한민족은 예수 잘 믿는다고 소문은 나 있으나 인류구원에 과연 응분의 몫을 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미루고 보혈의 은덕을 입을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우선 구세 사상을 실천해야 한다. 예수가 가르친 이웃사랑의 사상은, 사랑하면 이웃은 서로 구세주가 된다는 사상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테야 드 샤르댕은 인류역사의 목표는 만인의 그리스도화(christogenesis)라 했다. 구세의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남을 목표로 하는 인류미래를 그는 내다보았던 것이니, 그는 인생의 목표를 그렇게 본 셈이다.

실존적(實存的) 불평등과 악. 인류와 동물들은 싸움에서 힘을 내고 그 힘으로 살게 되어 있으므로 하느님은 힘을 내라고 악과 미움을 두셨다. 또 하느님은 역동성을 위해 불평등과 불공평을 두셨다. 그 길 밖에 없어 피치 못하여 그렇게 점지했으리라. 우리는 하느님의 그러한 딱한 사정을 이해하고 미움 대신 사랑을, 악 대신 선을, 불공평 대신에 공평을 마련하여 애써 하느님에게 효도해야 한다. 사랑이 우리 의무가 되도록 마련되고 주어져 있는 것이다. 구원과 구세의 이치를 탐구하자. 우주나 세상은 우연과 필연의 조합으로 되어 가는데 만일 필연만이라면 기계 같은 세상이 될 것이다. 생명다운 융통이 있자면 필연과 우연이 조화되어야 한다. 만일 필연적인 유전만이 있다면 옛날 박테리아만이 살던 때 같이 똑같은 후손만이 생겨날 것이다. 변화와 다양화가 있느라 자웅과 변이가 있게 되었다. 남녀처럼 오묘한 것은 없다. 유전적 분자결합의 우발로 변이가 생겨나고, 돌연변이라는 오류의 경우, 적자생존에 합격하면 고정되어 진화가 있게 된다. 때로는 병적요소도 유전하여 그 당사자는 불행하다. 누군가가 그 불행을 맡아야 하니 이는 마치 누군가는 사고를 당하는 이치와 같다. 이 세상에는 병과 고통이 있게 마련이고 그래서 건강과 평안의 소중함이 돋보인다. 어려움을 도맡은 누군가가 있게 마련인데 그것은 자연이요 정상이어서 우리가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한 감수해야 한다. 지체부자유아, 선천적 장애자, 병고에 시달리는 벗들이 모두 그리스도이다. 헬렌 켈러 같은 성자는 날 때부터 장님이요 귀가 먹었으나 천신만고하여 역사에 남는 지성인이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과 고통과 병고를 딛고 저항력을 길러 그 힘으로 살아가게 된다. 만일 절대로 공평하여 평형이 된다면 죽음 같은 세상이 될 것이다. 약동하는 세상이 되느라고 불평형이 있다. 먹이사슬의 포식과 속죄의 이치를 깨달은 원시인들은 희생의식을 행했다. 동물의 포식악은 인간세계에 와서는 제국주의라는 극악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처럼 죄악, 희생, 속죄는 인류학적 과학적 연구대상이다. 우리는 구속의 이치도 생각한다. 예수 당시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빌라도 총독과 그 밑에서 권세를 누리던 유대인 정상배 그리고 무지한 군중들에게 있던 죄는 지금 내 안에 있는 죄와 공통된 것이다. 이 점에 깨달음이 미치면 우리는 예수가 나 때문에 십자가 고난을 당하셨음을 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보혈의 공로만 생각하고 그이에게만 미룬다면 그보다 더한 얌체가 어디 있겠는가! 바야흐로 우리는 깨닫고 구세군이 될 때다. 과학자 테야 드 샤르뎅신부는 인류역사의 종국(終局) 오메가점은 그리스도 생성(christogenesis)이라 했다. 처음에는 필자도 무슨 뜻인지 몰랐으나, 나이를 먹고서야 이 글의 제목 같은 이치를 깨달았다.

지금 세상은? 합리화되어가는 한편 폭력과 허위가 날뛰고 더 악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고귀한 기독교의 빛과 소금이 더 요긴한 때를 맞았는데, 어쩌다 요즘 기독교는 장래를 염려하게 되었는가. 기독교가 하던 윤리적인 몫이 빈다면 세상은 어찌 되겠는가? 오늘날 독일 수상들은 과거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현장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하는데 일본 수상들은 대조적이다. 과거 일본제국이 지은 죄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는데도 말이다. 일본은 왜 그렇게 다른가? 기독교 정신이 없어서다. 하느님은 회개하는 자를 어여삐 보신다는 그러한 기독교 정신이 독일인들의 바닥에는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고귀한 기독교를 우리는 지켜야 하는데 그 일이 어렵게 되어간다. 반성하여 정직해지면 좋겠다.

불상(佛像)을 숭배했듯이. BC 500년경 석가모니는 인도의 유신론적 풍토를 딛고 무신론적 불교를 창시했다. 세월이 지나자 불교신도들은 석가모니불상을 만들어 예배했는데 이는 석가의 뜻에는 어긋나는 일이었다. 유대교에서 분기한 기독교의 경우도 교조인 예수를 숭배하려는 신도들의 정서에 따라 예수의 신화가 진행되었다. 모든 정서와 필요가 맞물려 삼위일체의 교리를 만들어 예수를 하느님과 같은 지위의 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만일 예수가 살아난다면 자기가 앉혀진 자리를 보고 크게 놀랄 것이다. 로마제국이 전성기를 지나 와해되려 했을 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제국의 통일을 위해 기독교를 수용·이용하기로 결심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려면 교조인 예수는 로마제국의 위신을 위해 최고신의 자리에 올라야 했으므로 유대교의 신인 야훼의 아들이라는 지위로는 부족했다. 성자 예수는 성부와 일체라는 논리로 예수가 높여져서 그것을 반대하던 아리우스 일파는 이단으로 몰려 학대받고 기독교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기독교가 로마국교가 되자 교세는 확장되었으나 이단으로 몰린 인구가 늘어나 이슬람의 침공 때 취약했다. 삼위일체 교리를 유대교 측에서 볼 때에는 엄청난 허구요 이단이었으므로 두 종교는 원수가 되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 점에 관해 가장 우려했다. 이제 우리는 차츰 사도신경을 박물관으로 보내야 한다. 주기도문이 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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