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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나라사랑(13) : 서재필의 근대화 구국운동

 

박종현 (한국교회사학연구원, 교회사)

 

송재(松齋) 서재필(徐載弼, Jaishon Phillip, 1864-1951)은 구한국 개화기에서 시작하여 3.1운동을 거쳐 한국전쟁이 벌어졌던 1951년까지 한국의 근대화와 구국운동을 실천하였던 선각자 중 하나였다. 그는 구한국이 지식인이며 고급 관료에서 출발하여 친일 급진 개화파와 친미 온건 개화파로 정치적 변화를 거쳐 3.1운동 시기에는 외교활동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진력하였고 해방 후에는 서구적 근대화가 실현된 신국가건설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서재필은 고종이 즉위하였던 1864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대구 서씨 서광효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7촌 서광하에게 입양되었고 7세에 상경하여 외숙 김성근의 집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882년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그는 개화사상에 관심이 깊어 개화파인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박영효 등과 교분을 쌓았다. 1883년 도일하여 일본 도야마군사학교에 유학하였고 1년 후 귀국하여 고종의 허락을 받아 조련국이라는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운영을 맡았다.

1884년 친위 쿠데타인 갑신정변에 깊이 관여하여 이들 세력이 정권을 잡게 되자 서재필은 병조참판과 후영영관을 맡아 군사권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3일 만에 갑신정변이 좌절하고 그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서재필은 역적으로 지명되었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은 극형을 받았다. 조선 조정의 압력으로 일본에서 갑신파의 지위가 어려워졌고 서재필은 1885년 일본을 떠나서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미국에서 서재필은 고등학교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고 미국 이름인 제이슨 필립을 가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니아의 라파이예트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생활고로 인해 워싱턴의 콜롬비아대학교 의학부 야간과정에 진학하였다. 1893년 학교를 졸업한 그는 의사 면허를 취득하였고 의학부에서 강의도 맡았다. 18946월에 미국 여성 암스트롱과 결혼 하였다.

조선에서 갑오개혁이 일어나자 그는 신정권의 요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10여 년간의 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친미 온건 개화파와 교류를 맺고 계몽운동을 펼쳐 나갔다. 10여 년의 해외 체류를 통해 서재필은 조선의 근대화 모델을 일본식 모델에서 미국식 체제로 선회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896년 애국계몽신문인 독립신문창간을 주도하였다. 유길준이 일본을 거쳐 유입된 서구문화를 소개한 반면 서재필은 장기간의 미국 체류를 통해 직접적인 서구문화를 소개할 수 있는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독립협회가 지향하던 주권재민 사상이나 민권운동, 언론운동과 근대화운동에 서재필의 영향은 크게 작용하였다.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는 근대 최초의 자주적 민권운동으로 구한국 체제 내에서 동학 등을 통해 표출된 민권의식을 가장 잘 나타내 주었다.

당시 서대문 근처에 거주하던 서재필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설립하는데에도 기여하였다. 독립협회는 입헌주의와 공화주의 논의를 기화로 강제 해산되었고 지도들이 대거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으나 이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로 개종하여 기독교 민족주의 운동의 뿌리가 형성되는 동시에 이들은 한국근대화 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독립협회는 남궁억, 양기탁, 안창호, 이승훈, 이승만, 이상재, 김규식 등 당대의 민족지도자를 배출하는데 기여하였다.

독립협회 사건 후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약 20여 년간 사업을 벌여 성공하였다. 그런 생활 속에서 그는 이승만 안창호 등이 미국으로 와서 독립운동을 할 때 이들을 후원하였다. 19181차 대전이 종결된 후에는 파리강화회의를 대비하여 국제여론에 호소하는 영자신문 발간을 서둘렀고, 19194월에는 3.1운동의 후속 조치로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를 통해 각종 결의문과 호소문을 작성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미국 적십자, 미국 국민,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발송하였다. 그리고 한국통신부를 조직하여 일본의 국제 여론전에 대항하는 여론전을 펼쳐 일본이 영향력을 장악한 미국 사회에 한국 입장을 밝히는 여론전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능통한 영어를 활용하여 미국에서 순회강연을 통해 한국의 정치적 입장과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설득하여 나갔다. 서재필은 장차 미국의 영향력이 급증할 것을 예측하고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긍정적 기여를 요청하였다. 미국의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한국 보급, 한국 독립이 미국의 정책에 줄 긍정적 요소들, 한국의 문화적 민족적 자존과 일본의 한국 식민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1921년 워싱턴 회의에 한국 독립의 문제를 의제화하기 위한 언론과 외교적 노력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이 회의에서 한국 문제가 직접 논의되지는 못하였으나 미국 여론의 주목을 받았고 한국 문제에 대한 여론의 긍정적 호응을 얻어 내었다.

1925년에는 한미일 기독교 민간회의인 제1회 태평양회의에 참가하였다. 한국대표부는 이 회의에 일본 YMCA가 아닌 한국 YMCA의 독립성을 인정받았고 그 일원으로 참석하여 기독교 민간외교를 통하여 한국의 주권을 국제적으로 보여주는 데에 기여하였다. 진보적 기독교 회의였던 태평양회의를 통해 한국인 대표는 한국의 문화적, 정치적 독립의 필요성을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호응도 받았다.

노년의 서재필은 1945815일 감격의 해방을 맞이하자 미군정 하지 사령관의 요청으로 군정청 수석고문 겸 과도정부 특별의정관 자격으로 19477월 귀국하였다. 그는 국민의 소리 방송을 통해 신국가 건설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각족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서재필은 자신의 모든 역할을 마치고 9월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필라델피아 근교의 노리스타운에서 거주하다가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1587세로 생을 마쳤다. 서재필은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 받았다.

서재필은 구한국 관료에서 갑신정변을 통해 급진개화파로 전환하였고 그 후 10년간 미국 체류를 통해 온건 개화파이며 미국을 모델로 하는 한국의 근대화를 일관되게 지향하며 근대주의자로서 민주주의, 민권운동, 언론인, 애국계몽운동가로 헌신함으로써 일제강점기의 외교와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과 해방 정국의 신국가 건설에 크게 기여하였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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