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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기독교 신앙의 거목 월남 이상재

 

박종현 (한국교회사학연구원, 교회사)

 

안동교회를 설립하였고 평양장로교신학교 교수였으며 한국교회사를 처음 저술한 알렌 클라크는 그의 한국기독교사의 인물 편에서 처음으로 다룬 인물이 월남 이상재(李商在 月南 1850-1927)였다. 클라크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존경을 가장 많이 받는 인물이 이상재였다고 그의 책에서 기술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월남은 대한제국 의정부 총무국장, 독립협회 활동에서 시작하여 오늘의 서울YMCA의 전신인 황성기독청년회에서 활동, 3.1 독립운동 참여, 조선일보사 사장,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지도자 그리고 비타협적 독립운동을 표방한 정치단체인 신간회의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였던 한국의 기독교와 민족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상재는 충남 서천 한산이씨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조선의 전통적 양반 가문 출신으로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원래 그의 조상 중에는 고려 말 유학자 목은 이색과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가 있었다. 이상재는 17세에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하였다. 그는 낙향하지 않고 온건 개화파인 박정양의 식객으로 머물게 된다. 박정양은 청년 이상재의 기개와 재능을 높이 샀고 이상재는 개화파 지식인 박정양의 정세판단과 개혁의지에 공감하게 된다. 1881년 박정양이 일본에 신사유람단으로 파견될 때 개인비서 자격으로 수행하게 된다. 그는 일본의 발전된 개화상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고 그 후부터 개화사상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일본 수행 중 교류한 김옥균 홍영식 등 개화파와 친분을 쌓은 그는 귀국하여 우정국 인천 지부를 맡아 공직 활동에 임하게 된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개화파와 교분이 깊었던 이상재는 우정국을 사임하고 낙향한다. 1887년에는 박정양이 미국 전권대사로 임명되자 그와 동행하여 미국에서 1년여 시간을 보냈다. 그의 미국체류는 이상재의 개화의지와 민권 의식 등에 더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귀국 후 박정양이 내무부 독판에 임직하자 이상재도 학부와 법부의 직위를 얻어 관직에 다시 임명되었다. 이상재는 1896년에는 독립협회가 조직되자 윤치호 서재필 이승만 이완용 등과함께 주요 멤버로 참가하였다. 이상재는 미국에서의 경험으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독립협회를 통해 이를 실현코자 하였다. 전국적인 순회강연을 통해 이상재는 민권의 중요성을 알렸고 정부 개혁안을 제시하여 내각책임제를 주장하고 이를 관철시키려 하였으나 조병식 등 반대파에게 밀려 오히려 독립협회가 해산되고 그는 투옥된다. 독립협회를 지지하는 대중들이 만민공동회의를 개최하여 독립협회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여 이상재는 태형 40대의 형벌을 받고 석방된 후 다시 낙향하였다.

1902년 개혁당 사건으로 다시 체포된 이상재는 옥중에서 기독교 서적을 탐독하는 중에 기독교 신앙을 깊이 수용하게 된다. 이후 이상재의 생애는 기독교 신앙의 깊은 영향력 아래 있게 된다. 1904년 석방되고 난 다음해인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고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1907년 한국군대가 해산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평민으로 돌아왔다.

한일합병이 된 후인 1913년 그는 YMCA 총무로 취임하였다. 한국 YMCA를 일본에 종속시키려는 일제에 맞서 한국 YMCA를 지켜내었고 청년들을 YMCA로 불러 기독교정신과 직업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에 매진하였다. 그리고 YMCA를 전국적 조직으로 결성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를 토대로 3.1운동에 기독교가 기여하고 기독교의 사회적 관심과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22년 조선교육협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취임하였고 기독교 지도자들과 민족지도자들을 규합하여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반대로 민립대학의 설립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가 YMCA에 재임하는 동안 한국 YMCA가 국제 YMCA 연맹에 일제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가입할 수 있도록 토대를 놓았고 한국 YMCA1920년대 농촌운동과 사회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여 YMCA는 향후 10여 년간의 사회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그는 1924년에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취임하여 잠깐 동안 언론계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1927년 신간회가 조직되었다. 신간회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지도자들이 연대하여 일제에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된 범이념적 정치단체였다. 3.1운동 이후 독립이 성취되지 못하고 또 1920년대 전반기 일제의 조선자치론이 무위로 그치면서 독립을 위한 총력적 전개로 신간회가 조직되었던 것이었다. 이상재는 신간회의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가 열리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미 병석에서 신간회 회장 취임을 맞았던 이상재는 1927427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월남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10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오리 전택부 선생은 이상재의 사상을 한마음 사상이라고 불렀다. 이는 월남의 정신세계가 늘 온화하고 행함에서는 중용의 길을 걸으며 조선의 개화를 위해, 기독교의 발전과 봉사를 위해,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한결같은 길을 걸었기 때문에 이상재의 사상을 그렇게 불렀다.

3.1운동 이후 독립이 좌절되자 1920년대 이광수 같은 이는 민족개조론을 주장하며 조선의 과거의 역사를 반성하고 그것과 단절하여 새 길로 나가기 위한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민족개조론에는 조선의 역사에 대한 열등감이 내재하고 있었다. 일부 개신교 그룹 안에도 한민족의 역사를 과대하게 폄하하거나 근대성에 대한 과도한 열망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간과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월남은 항상 동양과 서양 그리고 기독교와 한국의 고유한 정신과 가치를 공통적으로 존중하며 이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최초의 좌우합작 민족독립단체인 신간회의 회장으로 고령의 월남의 추대된 것도 이상재의 사상과 인품이 좌우의 사상적, 방법론적 대립을 극복하고 독립을 위한 역량을 모을 수 있는 넓은 사상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월남의 서거로 신간회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하고 수년 내에 해소되어 못내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모든 이념과 방법이 봉사하여야 한다는 큰 자취를 남겼다. 이는 오늘날 민족의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을 위해 어떠한 사상과 태도가 필요한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으로 남아있다. 이것이 월남 이상재를 기독교 선교 50년 무렵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하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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