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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와 어머니 - 유석종

성서와문화 2018.06.04 17:08 조회 수 : 7

6·25와 어머니

 

유석종 (미국연합감리교회 원로목사)

 

해마다 6·25가 돌아오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내 어머니의 고향은 개성인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솜틀 가게를 하던 홀어머니 밑에서 두 남동생과 함께 자랐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녔고 감리교 선교사가 세운 호스돈 여학교를 졸업하였다. 배화고녀 교장을 지낸 전수진 교장과 변형태씨 부인도 같은 반이었는데 셋이 늘 1, 2, 3등을 다투면서도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호스돈을 졸업하고 개성에서 유치원 보모로 일을 시작했으며 개성 송고를 나와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병원 원목으로 일하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처럼 작은 체구에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내내 직장생활을 하면서 딸 다섯, 아들 다섯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중 아들 셋은 어려서 사망하였고 일곱 자녀가 지금까지 생존해 있다.

아버지가 감리교 목사라 가족을 데리고 장단과 고랑포 등 파송지로 옮겨 다니다가 왜정 말기 교회 문이 닫히는 바람에 목회를 못하고 문산으로 이전, 구세약국(救世藥局)을 차리면서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문산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사회 활동은 다양했다. 문산에서는 국민학교 선생으로, 군청 부녀과 촉탁으로 일을 하였고, 또한 대한부인회 파주군 지부장직을 여러 해 연임하였다. 6·25 동란이 일어날 때까지는 대한부인회 총본부의 박순천 여사 밑에서 계몽운동과 미신타파 사역을 담당하였다. 어머니는 소형 확성기를 들고 시골 마을을 찾아다니며 여성을 상대로 계몽활동을 하였고, 집 뒤뜰에 안치해 놓은 우상들을 부수어 태워버리는 일을 하느라고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날도 자주 있었다. 그러기에 개성에 두 아들을 둔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 계시면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셨다.

그러다 6·25가 터졌다. 지역 유지 가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우리 집안은 하루 아침에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되었다. 국민회 군지부장으로서 반공연설을 하고 다녔던 아버지는 내무서원에 체포되어 우리 집 바로 옆에 있는 내무서 구치소에 한 달간 수감되어 있었다. 어느날 수감자들을 다른 곳으로 이송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식구들이 모두 나와 내무서 뒷문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트럭 한가운데서 몸을 일으킨 어버지와 눈이 마주친 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그 후 아버지의 소식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머니 역시 8월 말쯤 체포되어 한 달쯤 같은 내무서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어느날 어머니는 다른 여 수감자 9명과 함께 포박이 된 채 어디론가 끌려가게 되었다. 국도는 북쪽으로 이동하는 사람들로 붐볐고 폭탄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런데 우연이라고 할까, 어머니 일행을 인솔하던 간수는 국민학교 시절 어머니가 가르친 제자였다. 자연히 어머니와 간수 간에 대화가 시작되었고, 그를 통해 어머니는 지금 그들이 어디로, 왜 끌려가고 있는지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다. 인민군이 유엔군에 밀리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임진강가 처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는 그 제자 간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제안은 우리 열 사람을 풀어주면 세상이 바뀌게 될 때 책임지고 그를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이었다. 어머니의 끈질긴 설득에 마음이 돌아선 간수는 유엔군의 공습을 피한다는 이유로 일행을 숲속으로 끌고 들어가 일부러 시간을 지체하기 시작했다. 이런 시간 지연작전으로 20리 길을 가는데 한나절을 보냈고, 목적지를 5리 앞두고 갈림길이 나오자 그는 왼쪽 길 대신 오른 쪽 길을 택했다. 그리고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연행자들의 몸에 감긴 밧줄을 모두 풀어 주었다.

간수의 손에서 풀려난 어머니와 일행은 재빨리 산과 옥수수 밭으로 흩어졌다. 워낙 발이 넓었던 어머니는 부인회 관계로 아는 집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세상이 바뀌었다. 인민군이 모두 철수하고 유엔군이 진군해 들어온 것이다. 하루아침에 자유의 세상이 된 것이다. 어머니는 너무나 감격하여 길바닥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하늘을 향해 연상 감사하다고 외치며 단숨에 문산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후, 어머니는 자기 생명을 구해 준 그 청년이 국군에 체포되어 공개재판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어머니는 함께 목숨을 건진 사람들을 동원해 공개재판이 열리는 문산국민학교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서서 이 청년이 우리 열 사람을 살려주었다. 그를 사형에 처하려면 우리 열 사람도 같이 죽여달라고 눈물로 증언을 하며 그 청년을 살려달라고 호소하였다. 그 결과 그 청년은 처형을 면할 수 있었다. 그 후 그 청년이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1·4 후퇴 시 우리 집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고 우리는 영구히 문산을 떠났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과의 접촉이 끊기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 꿈에 그의 모습이 희미하게 나타나지만, 나는 그 당시 너무 어렸었기에 그의 성이 이씨라는 것 외에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의 이름을 알아 두었더라면 나중에 그를 찾아 고마움의 표시를 나눌 기회가 있었을 텐데 후회가 크다.

이 극적인 사건 후 어머니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삶으로 바뀌게 되었다. 어머니는 나는 죽은 목숨이었는데 살아있으니 이제 나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다. 나의 남은 날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덤으로 받은 것이다. 나는 이제 한 살이다는 말을 되풀이하곤 하였다. 그리고 호적을 재정리할 때 어머니는 김금점(金今点)이었던 이름을 김성일(金聖一)로 개명을 했다.

1953년 휴전이 되자 우리는 금촌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고 어머니는 실향민 수용소에서 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새벽기도회에 나가 공산당에 납치되어 생사를 모르는 남편과 전쟁 중 북행길에 오른 두 딸을 위해 피눈물 나는 기도를 드렸다. 그러던 중 신도교회의 박대희 목사를 알게 되었고 박 목사님의 도움으로 벽제에 감리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벽제국민학교 교실을 얻어 예배를 드렸고, 신도교회를 석조건물로 신축하고자 구예배당을 헐 때 나온 재목을 얻어 벽제국민학교 바로 옆 땅에 예배당과 교회 사택을 건축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5년간 담임 전도사로 벽제감리교회를 섬기다가 어느날 잔치집에 다녀온 후 식중독에 걸려 일주일 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때 위로 3남매는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집에는 외할머니와 아래 동생 둘만 있었다. 어머니의 나이 52였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이 메는 이유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죽음의 길에서 생명의 은인을 만나게 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다. 처형장으로 가는 길에 제자 간수를 만나게 된 것이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그와의 만남이 있었기에 열 한 생명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고, 어머니의 삶에 큰 변화가 오게 된 것이 아닌가? 분명 그곳에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고 있었다고 본다.

둘째, 어머니는 상반된 두 이념 사이에서 몸부림치며 사셨다는 것이다. 우리 조국이 이념 전쟁으로 분열되고 피를 흘렸듯이 우리 가정도 상반된 이념 때문에 쪼개지고 피를 보게 되었다. 공산당에 남편을 잃고 본인도 처형장 문턱까지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처지지만 두 딸이 월북하였다는 이유로 어머니는 큰 짐을 지고 살 수밖에 없었다. 학교 선생으로 복직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거의 한 달이 멀다고 형사들이 찾아와 어머니를 괴롭혔다. 북에 간 딸들과 연락이 있는지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어머니는 두 딸이 디디고 있을지 모르는 북녘 땅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안녕을 위해, 그리고 조국 통일의 날을 염원하는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가셨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반세기가 지나 어머니의 소원이 일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과정은 이러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선교사의 주선으로 9살짜리 막내 남동생이 미국 가정에 입양이 되었고, 그 가정을 통해 우리 4남매가 차례로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미국 시민이 되었기에 북에 있는 두 누님을 찾을 수 있었고, 2004년 헤어진 지 54년 만에 북에 있는 두 누님과 재상봉을 하게 되었다. 먼저 가신 어머니의 소원이 미국으로 이민 온 자식들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어머니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미국 땅으로 보내 주신 것이 아닐까.

어머니의 남은 소원, 조국통일과 화해의 날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통일의 선물을 들고 어머니 곁으로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