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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모든 것의 끝인가?

 

전병재 (연세대 명예교수 사회학)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사후세계는 존속하는 것일까? 나이 팔십 고개를 넘으니 친구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가고 나 또한 잔가지에 매달린 고엽 신세가 되어 죽음의 문제에 대한 이런저런 상념이 짙어진다. 우리는 왜 죽음을 싫어하는 것일까? 죽음은 신체적 고통을 안겨준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잠자듯이 편히 죽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병원에서 강한 마취제로 고통 없이 죽어가기도 한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고통스러운 것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끝자락이지 죽음 그 자체는 아니다. 죽음은 우리를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 때문만은 아니다, 죽음의 고통은 대부분 죽음에 대한 우리들의 부정적 고정관념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영원한 이별, 내가 아끼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는 상실감, 미지의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남들은 살아가고 있는데 나만이 먼저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패배감 등이 우리가 죽음을 싫어하는 이유들일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어쩌다 이야기가 시작되어 의견을 타진해 보면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문제를 그리 진지하게 생각해 본 일이 없다는 소극적인 반응이다. 이는 그들이 죽음을 너무 두려워해서 생각하기조차 싫어하는 탓인지 모른다. 계속 물어보면 죽어보지도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는 회피성 대답이 돌아오기 일쑤다. 이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심층심리 속에 안고 살아가면서도 되도록 이런 달갑잖은 생각을 외면하고 순간순간 삶을 즐겁게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면서 죽음을 극도로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불가지론자들과는 달리,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단멸론자들도 있다. 이런 주장은 현대과학을 신봉하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특히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은 두뇌 작용의 부수현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는 소위 수반이론이 그것이다. 이런 수반이론은 현대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분석철학의 아류이기도 한데 어떤 분석철학자들은 사후세계와 같이 논리적으로 입증될 수 없는 문제는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불가지론을 택하고 있는데 비해서 이들 단멸론자들은 수반이론에 입각해서 뇌기능이 정지되면 의식은 사라지고 육신의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이와는 달리 사후세계를 믿는 이들도 있다. 여기에는 기독교적 영생론자들과 불교 및 힌두교의 윤회론자들이 있다. 성경에는 금생은 덧없는 것,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하느님 나라는 영생이 보장된 낙원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요한복음 3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524절에는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1125절에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는 예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요한계시록 1413절에는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214절에는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돈독한 기독교도들은 이 말씀에 따라 하나님 뜻대로 성실하게 살다가 죽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금생이 단 일회적인 죽음으로 영원한 천당이나 지옥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기독교의 영생론과는 달리 윤회론은 무수한 삶과 죽음이 계속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사상은 희랍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유행되고 있었다. 키케로에 의하면 이 재생의 원리를 가장 먼저 가르친 사람은 페레키두스이고 이를 체계화한 사람은 피타고라스(기원전 582-507)라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재생론은 에메도클레스(기원전 490-430년경)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젊은 시절 정치가였던 그는 후에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더 높은 부름의 소리를 듣고, 왕위도 버리고 수행의 길로 접어든다. 그의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소년으로도, 소녀로도, 수풀로도, 새로도, 바다 속 말 못하는 물고기로도 살아왔느니. 이곳 지상에서 죽음을 면치 못하는 존재들 사이를 헤매고자 그 얼마나 위대한 광영에서, 고원한 지복에서, 이곳으로 굴러 내려왔더란 말인가!”

재생론을 가르친 철학자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플라톤(기원전 427-347 )도 있다. 그에 의하면 한때 신적 존재였던 우리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내면적 균형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마음을 제대로 가눌 수 없게 되면 물질 속으로 전락하게 되고, 근기에 따라 다양한 존재로 태어난다. 사람이 죽으면 악인의 영혼은 지옥의 밑바닥인 타르타로스에서 고통을 겪게 되고, 선인의 영혼은 천상계에서 즐겁게 지낸다. 이렇게 천년이 지나면 모든 영혼은 다시 지상에 태어나는데 어떤 영혼은 동물로 태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영혼은 자신의 재생을 선택하며, 그렇게 재생의 삶을 사는 동안 언제 또다시 자신의 재생을 실현시킬지 그 시기를 선택할 수 있고 또 통찰력을 키울 공덕을 쌓을 수도 있다. 이렇게 지상에서 열 번의 생을 겪은 후 영혼은 정화되어 신적 존재의 상태를 회복하게 되지만 다시 굴러 내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는 것이다.

희랍 철학의 윤회론은 플로티누스(205-270)에 의해 재정립된다. 그는 모든 영혼들이 일자(一者)’라고 부르는 우주적 원리와 한때는 합일상태에 있다가 설명 불가능한 어떤 필연성 때문에 지복의 상태로부터 떨어져 경험적·시간적 존재로 전락한다고 했다. 거기서 영혼은 감각적 집착의 강도에 따라 천상계, 인간계, 축생계, 심지어는 식물의 형태로도 몸을 받아 삶을 이어가야 한다. 그들의 운명은 정확히 자신이 지은 이전의 행위에 상응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감각으로부터, 그리고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스스로를 정화하는 데 성공하면 다시금 일자와 재결합하여 해방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윤회론은 희랍사회에서조차 한 번도 제대로 대중화 되지는 못한 채 소수의 사색가들 사이에서 이어져 오다가 기독교 신앙의 영향 속에서 각종 영지주의로 흡수된다. 카르포크라테스는 예수의 말씀(마태복음 525-26, 누가복음 1258-59)을 재생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했다. 즉 예수의 비유 중에 감옥은 곧 육신을 의미하고 마지막 동전의 지불은 모든 잘못된 행위에 대한 속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도 중에서 영지학파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사상가로는 오리게네스{185-254}를 들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영혼은 하느님에 의해 지음을 받았으며 언젠가는 하느님에게 되돌아가게 된다. 지옥을 위시한 하계는 다만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 있을 뿐, 결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후 유럽에서 기독교가 지배적 사상으로 군림하게 되자 윤회라는 개념은 표면에서 사라지고 겨우 이단적 변종으로만 그 명맥이 유지되어 왔다.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조르다노 브루노(1548-1600)가 영혼(그는 이것을 모나드라 불렀는데 이 용어는 그의 철학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물적 심적 요소를 가리킨다.)은 세계령()으로 온 우주에 편만해 있는 동시에 사람, 동물, 그리고 식물 하나하나에까지 내재하여, 한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윤회한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이 교회의 공식적 교의에 반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그는 화형에 처해졌다. 영혼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이 세상에 단 한번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기독교 교리는 기독교도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서양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의 생각 속에까지 깊이 뿌리 내린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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