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 - 2018년 성서와 문화

무신론과 유신론을 넘어서서

 

장기홍 (경북대 명예교수 지질학)

 

성서와 문화(2018)에 실린 고난을 극복하는 길이라는 글을 읽고, 그 글의 필자가 지난 20년간 봉직하던 신학교에서 강제로 해직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해직의 이유는 개신교 사람들이 훼손한 불교사찰을 복구하는 일에 참여했기 때문이라 하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20여 년 전 대구 등지에도 밤중에 불상(佛像)이 파괴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만행을 좌시할 수 없다는 한 분이 나를 찾아와 불교청년들도 이제는 맞서 싸우려고 하는데 어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몇몇이 모여 종교간 갈등의 문제에 관해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종교간 화합(和合)의 모임의 시작이다. 우리가 모여 종교를 깊이 탐구하면 그런 갈등(葛藤) 문제의 핵심에 이르지 않을까 해서 공부를 시작했을 뿐이다. 20년 세월이 지난 지금 종교가 서로 다른 것이 결코 불화의 원인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모임의 회장을 맡은 필자는 6·25사변 후 대학생 때 유영모, 함석헌 두 선생에게서 논어(論語)와 노자(老子)를 배운 일이 있었으므로 우선 그것을 기초로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회원들은 불교, 천주교, 그리고 개신교에서 자란 사람들이어서 때로는 불경과 성경도 읽었으나 논어와 노자를 읽는 데 시간을 많이 썼다.

논어는 공자(孔子)의 어록이고, 노자는 노자 자신과 그 후 수백 년 간의 제자들의 합작이다. 공자는 세상의 구원(救援)을 위해 도덕질서의 확립을 추구하여 인(, 사랑)과 예(, 몸가짐과 도덕풍속)를 강조했다. 노자는 인생과 우주의 진상을 탐구하여 도()와 자연(自然)을 가르쳤는데, 도법자연(道法自然, 도는 자연을 본뜬 것)이라 하여 가장 근본 되는 것이 자연이라 보았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보지만 노자는 창조나 창조자 대신 자연을 일컬었다. 자연(自然)이란 그냥 늘 그대로인 것” “있어서 있는 것이므로 별도로 창조나 창조자를 일컫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을 있어서 있는영원자(永遠者)라 한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자연은 동격이 된다. 그러한 등식이 얻어지는 셈이다. 한편,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을 초월자(超越者)라 보므로 우주 밖에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무궁한 대우주(大宇宙)에는 밖이 없고, 가도 가도 우주 안일 터이므로 결국 하느님의 신비함을 강조해서 초월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 같다. 구약성서에 기초한 유대인 전통은 야훼’(여호와) 하느님은 감히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되는 존재로 되어 있다. 하느님에 해당하는 도()에 관하여도 노자(老子) 14장에는 보아도 보이지 않아 이(, yi)라 불러보고, 들어도 들리지 않아 희(, hsi)라 불러보고, 잡아도 잡히지 않아 미(, wei)라 불러본다고 쓰여 있다. Yi-hsi-wei라는 발음이 여호와와 흡사하다 하여 선교사들이 신통히 여겼다 한다(오강남 역, 노자, 현암사, 1995, 71.)

공자는 불확실하고 애매한 초현실적 문제에서 서성대기보다 현실문제에 주력할 것을 역설했다. 공자처럼 석가도 신()을 일컫지 않았다. 공자는 신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했으나, 그는 사람들이 신을 받드는 의식(儀式)에 참여해서는 매우 엄숙한 태도로 두려움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석가는 무신론자로 분류되는데 그는 불화살을 맞아 신음하는 중생이 있다면 화근을 제거하는 일이 급선무(急先務)이니 자기는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다.

유대교 전통은 아브라함이 깨달은 신의 믿음 위에 굳게 섰으므로 기독교의 교조(敎祖) 예수도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시오. 둘째 계명도 마찬가지이니, 각자 자기를 사랑하듯이 이웃도 사랑하시오라고 가르쳤다(마태복음 22). 이런 요절(要節)이 있는 마태복음에는 예수의 족보가 먼저 나오는 등 특징이 있어서, 그 때문에 신약성서에서 맨 앞에 놓이게 되었다. 마가복음이 더 먼저 편집되었음이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이 맨 앞에 놓여 그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예수에 따르면,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 실천(實踐)의 측면에서 사람을 사랑한다. 그런데 사람사랑은 공정하고 공평해야지 자기종교끼리만 사랑하면 도리에 어긋날 터이다. 만일 타종교의 사람들이 불의(不義)를 행하면 반대해야 할 것이나, 종교가 다르다 해서 미워하고 배척하면 그것은 독선이고 이기주의이다. 타종교에 있는 진리와 그 사람들을 사랑하면 서로 배울 것이 있어서 유익함과 친목이 보상으로 주어진다.

강원도 평창에서 열흘간 겨울올림픽이 열린 후 어제는 그 폐회식이 있었다. 전자(電子)예술의 장관이 펼쳐졌고 순서에 따라 케이팝 가수들이 나와서 내가 제일이다” “내가 제일 잘 나간다” “내가 제일 잘 났다” “나는 제일이다하고 한바탕 춤을 추며 노래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외국인이 가사의 뜻을 묻는다면 어떻게 답했을까? 수년간 단련하여 마침내 메달을 따서 의기양양 외치는 소리라고 주석을 달았으리라. 영어로 통역되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좀 유치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점점 유치한 세상이 되어간다. 해방과 6·25전쟁 후는 혼란기였지만 대중잡지는 교양을 높여주었다. 병원이나 은행의 대기실에는 여원’(女苑)같은 좋은 잡지가 꽂혀 있어 읽을 만했다. 그러나 지금은 광고 위주의 천박한 책자만 널려 있다. TV가 온 선남선녀의 혼을 다 빼지만 교양이 될 내용은 애써 찾아야 겨우 발견된다. 세태(世態)를 따르다가는 무지와 타락의 나락에 빠지게 되어 있다. 그래도 <성서와 문화>의 독자라면 뜻이 통하리라 싶어 이 글을 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위하게 되어 있으며 자기를 위하느라 애쓰다 보면 결과적으로 세상을 위하고 남을 위하게 됨이 사실이다. 나아가 옛 인도 사람들처럼 범아일여(梵我一如)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범아일여는 나와 하늘이 같다는 뜻이니, 나를 초월하여 우주와 일치함이다. 필자는 며칠 전 서점에서 손봉호 교수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과 한자경 교수의 자아의 탐구라는 책을 발견했다. 인류의 스승 석존(釋尊)를 탐구하기 시작하여 매진한 결과 해탈(解脫)했다지 않는가.

대개 종교는 자아(自我)를 추구하는 일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추구의 과정에서 궁극적 관심사에 이르게 되며, 마침내 인류의 공동 이념(理念)과 그 실천에 헌신할 것을 깨닫기에 이른다. 우리가 만일 여러 좋은 종교의 가르침을 참고하여 자아와 자기 종교를 성찰하고 인생의 목표를 참되게 설정하려고 노력하면 편협과 타락에 이를 위험성이 적어질 터이다. 이러한 종합의 노력을 통하여 우리는 자기 종교의 아집(我執)의 위험성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종교 간의 몰이해와 불화, 반감과 싸움에서 일어나는 만행과 비극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면 종교 간의 이해와 화목은 실로 중요한 과제이다.

필자는 인격신의 개념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 자신이 사람이므로 함께 소리 내어 기도할 때도 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이미 하느님은 진리라고 하고 진리이신 하느님을 일컬어왔다. 너무 인격적인 하느님을 고집하면 이 세상의 악이나 모든 언짢은 일의 책임을 다 그에게 떠넘길 형편이 되어 곧 실망하고 무신론으로 흐르기 쉽다.

종교 간의 대화와 화합을 위해서는 우선 언어가 공통되어야 할 터이다. 그 하나는 하늘이요 하느님이다. 중국에는 은()나라 때부터 상제(上帝)라는 개념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용이 되지 않고 있다가 천주교에서 중국어 성경 번역을 할 때 하느님이나 하나님 대신 상제(上帝)란 용어를 썼다. ()의 개념은 중국고전에 허다히 쓰여 왔다. 천인관계(天人關係)란 항목도 자주 볼 수 있다. 그때의 천()은 하느님과 흡사하나, 보통 그냥 하늘이라 한다. 거기다 을 붙이는 것은 사람들이 하늘을 의인화(擬人化) 혹은 인격적으로 받들어 경외하는 마음에서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사람 자신이 인격적 존재이므로 그가 쓰는 말버릇이다. 나는 대학생 때 유영모 선생에게서 기도는 자기(사람) 들으라고 하는 것이라는 풀이(해설)를 들었다. 하느님은 꼭 한국말을 해야 알아들을 존재가 아니다. 주로 사람의 사정 때문에 대화(對話)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하늘은 하느님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요즘 어떤 기독교 목사는 열심히 무신론을 주장하고 나서는 것을 본다. 그는 영국의 도킨스 등 세계적 과학자들의 무신론을 수용하여 그대로 주장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최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스티븐 호킹 박사도 물리학의 발달은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확언했다. 필자는 생물진화를 공부해 온 과학자로서 생물뿐 아니라 만물이 모두 진화하는 사실을 안다. 진화란 말 대신 변화라고만 말해도 좋겠다. 변화과정으로서의 우주의 사실이 있고 여러 가지 원리가 그 우주 물질을 운영하고 있음을 본다. 그 총체는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정연하므로 옛날부터 우주를 코스모스(Cosmos) 곧 질서 그 자체라고 일컬어 왔다. 우주는 하나라는 뜻이다.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는 우주 자체가 하느님이라고 정의(定義)했다. 그보다 앞서 조르다노 브루노도 우주를 하느님이라 말했다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하기까지 했다. 아직도 기독교 한쪽에서는 그런 하느님 개념을 범신론이라 하지만 나는 스피노자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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