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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감격 - 최종태

성서와문화 2018.06.04 17:04 조회 수 : 2

오랜만의 감격

 

최종태 (서울대 명예교수 조각가)

 

얼마 전에 대학 총동창회장 이름으로 편지가 한 장 날아왔다. 흔히 있는 일이 돼서 그런 거려니 하다가 그래도 하고 뜯어보았더니 졸업 60주년을 축하한다는 인사말과 함께 기념배지를 만들었으니 신청하라는 내용이었다. 어찌나 반가운지 즉석으로 신청서를 제출하고 두고두고 며칠을 기분이 좋았다. 근래에 기분 좋은 일이 없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인데 배지 준다는 것에 그렇게 감격할 일은 아닌 것 같고 대학을 졸업하고 60년 세월을 잘 살아왔다하는 것이 자랑스러웠는지도 모른다. 내 지나간 인생이 푸른 하늘에 뭉게구름처럼 솟아올랐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휴전이 되고 환도(還都)가 되고 그런 다음에 미술대학으로 진학했다. 대학 다닐 형편도 못 되고 아버지는 법대(法大)면 모를까 하시는데 내가 그냥 무작정으로 상경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대 모험을 한 것이었다. 오직 꿈 하나만 믿고서. 여러 가지로 고생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돈 고생이 가장 컸다. 다른 친구들은 아르바이트도 잘 했는데 나는 전혀 그런 일을 하지 못하였다. 어머니가 많이 걱정이 되셨을 터인데 그때는 그런 생각도 할 줄을 몰랐었다.

그 무렵 대전에서 부산가는 데 기차로 10시간 이상 걸렸다. 그것도 왜관까지는 아홉 시간을 서서 가야했다. 요새 사람들이 그걸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명동은 쑥밭이었다. 서울에 고층 건물이란 것은 화신백화점이 있었고, 신세계백화점뿐이었다. 시내버스노선이 몇 개 있었지만 사대문(四大門) 안이면 걸어서 다녔다. 음악 홀이 몇 개 있어서 오아시스라고 했다. 싸르트르가 어떻고 피카소가 어떻고 젊음은 꺾이지 않았다. 휴전이라고는 했지만 서울은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 통행금지가 몇 시였던가. 비상시라는 것은 지속하면 평상시가 되는 것이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시간 속에서 예술이 어떻고 진리가 어떻고 하며 우리 젊은이들은 청운의 꿈을 펼치며 살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1958년 봄 미술대학을 졸업한 것이다. 60년 전의 일이 아닌가.

좋은 친구들을 만나고 좋은 스승들을 만났다. 도예가 이종수, 화가 이남규를 만났고, 시인으로 박용래, 임강빈을 만났고, 조각으로는 최의순, 최만린을 만났다. 이동훈하면 최고의 스승인 줄 알았더니 서울에 와서는 더 무서운 장욱진과 김종영을 만난 것이다. 이만한 자산이면 겁날 것 하나 없었다. 천하 대군을 거느린 것과 같이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캄캄하고 답답하였다. 세상이 왜 이 모양인가. 그 무렴의 심정이 그러했다. 나는 너무도 미약하고 어찌할 방도를 찾을 수가 없었다. 종교에 의지하고 싶었다. 그때 대전 대흥동성당 오기선 신부를 만난 것이다. 보자마자 모든 걸 다 내려놓았다. 세례를 받고 60년이 되었다. 인생이 다 늙었는데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아들 낳고 딸 낳고 손자손녀 보고 그림 그려서 상도 받고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넘기고 온갖 풍상 다 겪었다. 부모 형제 다 가고 나만 달랑 허공에 뜬구름처럼 의지할 곳이 없다. 그림이란 것도 얼마하면 이른바 대가가 되는 것인 줄 알았는데 할수록 첩첩이 산이었다. 그야말로 끝이 없었다. 내 앞에 지금 확실한 것은 삶의 끝이 몇 발짝인가 하는 것뿐이다. 이 때 60년을 잘 살았다는 그 동창회 인사편지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어려운 고비 고비 수도 없이 많았건만 시간이 가다보면 그럭저럭 잊어버렸고 마음은 염색이 안 되는 것인지 흙탕물이 되었다가도 깔끔히 씻기는 수가 있었다.

그 질곡의 시대 막바지 내가 쉰 살 되던 해에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1982년의 일이었다. 하나는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 날 아침의 일이고, 또 하나는 어떤 날 저녁 식탁에서 생긴 신비적 체험이었다.

하루는 손님이 왔다가 가고 저녁 식탁에 아직 내가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이성 활동이 중단되고 딴 세상을 만난 것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 막대한 어둠 같은 것을 만난 것 같다. 그 때 느낌으로 내가 최고의 경의를 표해야 될 일 같았다. 얼른 절을 하고 바닥에 앉았다. 그랬는데 내가 살아온 일생이 찰나에 다 보였다. 그것도 긴 일생이 동영상으로 찰나에 보인 것이다. 잘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잘 못한 것만 보였다. 다음 순간에는 나라는 현재가 보였는데 이룩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오직 맑은 물 같은 것만 있고 아무것도 없었다. 지체 없이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있었는데 모든 것은 내가 다 잘못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보이는 대로 그랬다. 눈물이 비 오듯 하였다. 그때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무엇이 보였다. 형상으로는 아니었지만 누군가와 대면하고 있었는데 한없이 좋은 인격체였다. 아무 헛소리를 해도 상관없는 누구였다. 그래서 당신이 여기 있었는데 내가 어디 가서 찾아 헤맸는가 하고 웃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와 함께 있었다. 다음에는 앞에 식탁과 그릇들 모든 것들이 하얀 빛으로 보였다. 그 다음에는 빛이 위로부터 온몸으로 쏟아졌다. 온통 빛 속에 내가 있었다. 그 빛은 생명이고 사랑이고 기쁨이었다. 그 빛이 내 온몸을 투과하는 것이었다. 모세혈관을 다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환희에 넘치는 그 시간이 얼마였는지는 모른다.

또 한 가지 사건이라는 것은 이러했다. 아침이 되고 눈을 뜨는 시간이 있다. 내가 어떤 날 아침이 되었는데 이불 속에서 눈을 막 떴을 때 조각이라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하는 소식이 왔다. 잠을 깨면서 의식이 들어오기 이전에 생긴 일이다. 평생의 숙제인데 찰나에 답이 온 것이다. 그때 어찌나 좋았던지 기쁨과 함께 큰 감격이 있었다. 밝은 것 환한 것 큰 것 그런 느낌이었다. 누가 지키고 있다가 잠깨는 시각에 모르는 것이다하는 답을 넣어준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빛의 사건 이후 이상한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그렇게 두 달 가량을 지나다가 평상시로 돌아왔다. 왜 모른다는 것으로 답이 되었는지 지금도 그것은 알 수가 없다. 이 알 수 없는 두 가지 사건은 세월이 가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서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만고풍상이라는 세월 그 속을 지나면서 사람들이 단단해지는 것이다. 실패와 성공은 동전의 앞뒤와 같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찬바람도 이겨내고 된서리도 이겨야 된다. 겨울 끝에 봄은 오고 밤이 지나서야 아침이 온다. 예술의 길에 들어서서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 것일까. 굽이굽이 걸어온 길 아득하지만 앞에 남은 길은 얼마일지 가늠할 수가 없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생명을 얻는다 했듯이 내 안에서 기존의 질서가 무너져야 새로운 그림을 만날 수 있다. 벚꽃이 휘날리는 4월 희미한 달빛 사이로 팔십 몇 해의 세월이 살 같이 지나갔다. 봄이 오면 꽃은 다시 피어나지만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 올 줄 모른다. 인생은 유한하고 그림은 끝남이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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